책이야기

20 진정한 까도남 로마 이대 황제 티베리우스

박진양 2013. 1. 5. 15:32

 

 

 

 

 

 

 

캐나다에 이민와서 살면서 보니 캐나다는 법치 국가임을

느낀다.

시의원들이 참 부지런하고 뭔가 여론이 형성된다고

느끼면 얼마후에는 법으로 제정이 된다.

그리고 이십사시간 국회에서 의원이 발표하는 것을

계속 티비에 방영이 된다.

법이 곧 현실이 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현실은 역사인 것 같다.

반복되었던 현실이 역사이고

반복될 역사가 미래가 아닌 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민의 대한 정책도 수시로 바뀐다.

그 때의 현실에 맞추어.

외국에 살며 더욱 느끼는 것이 현실감을 잃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반복된 현실인 역사가 더욱 와 닿았는 줄 모르겠다.

친구 차형이 이천 팔년에 보내 준 책이 참 위로가 많이

되었다.

어쩌면 친구 차형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에 이렇게 쓰 보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로마의 이 대 황제 티베리우스를 생각하면 애잔한 느낌이

든다.

혼자서 과묵히 정무를 보는 어깨위로 존 바에즈의 애절한

목소리로 노스 칸츄리 블루스란 노래가 내려앉는 것

같다.

참 외롭다는 느낌이 많이 들고 그 속에서도 용케

인간의 품위를 잃지않고 상식을 유지할려고 노력했다는

생각이 든다.

로마 황제중 제일 인상이 깊은 사람이다.

그의 일생에서 재능은 넘치되 사람을 별로 좋아 할만한

환경을 가져보지 못한 불행한 처지여서 성격 또한 까칠했다.

솔직하고 직선적이고 담백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나은 것

같다.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지명을 했지만 첨 부터 명쾌

하게 한 것은 아니고 후계자로 먼저 지목한 사람이 다

죽고나서 어쩔 수없는 선택임을 서로가 잘 알았다.

그나마 그 자리 마저 징검다리씩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에게 넘겨 주기위한 후견인 정도 랄까.

그래도 이런 것을 보면 로마는 법치 국가였구나 싶었다.

동양에서 왕이 된 순간에 모든 것이 그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는데.

생선이 머리부터 썩듯이 그래서 절대권력이 잘 부패하는지.

로마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아우구스투스도 인간이지라

두가지 큰 실책을 범하게 된다.

첫번째는 게르만족과의 경계선을 카이사르가 라인강으로

정했던 것을 넘어서 진격해 삼만오천 군대가 숲 속에서

전멸한 사건이다.

아그리파가 먼저 죽고 말년에 있었던 사건이었던 것같다.

전략의 천재 카이사르가 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보병이 강한 로마가 강을 두고 있으면 적이 보여 방어가

쉽다.

그리고 잃을 것이 없는 야만족은 다루기 더욱 까다롭다.

지금의 독일의 있는 숲보다 이천년전에는 끝도 없었고

그 숲속에서의 게릴라전으로 적이 나오면 속수무책이라는 곳을 잘 알았다.

말년의 아우구수투스가 사부님 카이사르를 넘어 뭔가 보여 주고 싶어했던 것같다.

리더가 오버하면 망한다는 좋은 예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한 것을 아니지만 군사 경험이 없는

그로서 책상위 이론상의 검토만으로 지휘관을 잘 못 선정한 책임은 있다.

그런데 그 때 사건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게르만 족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민족간의 분열이 더 일어났고

로마에선 평상시에는 공화정으로 돌아가자는 아우구스

투스에게 비판적인 원로원까지 모두들 위로하고 담합의

계기가 되었다.

그런점이 로마의 큰 장점이다.

서로 비판하다가도 적에게 패배를 해서 비판을 받을만 해도

그런 상황에는 서로 책임을 묻지않고 감싸주는 위대한

점이 있다.

두번째는 아우구스투스는 지나치게 핏줄에 집착했다.

물론 요즘에도 핏줄에 집착을 하는 기업인도 많은데

이천년전에도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실력이

있으면 식민지 사람도 피부색도 다른 사람까지 포용한

카이사르와는 다른 점이었다.

그래서 비극이 싹 텃는 지 모르겠다.

그 비극은 티베리우스를 넘어선 세대에 나타났던 것같다.

그리고 그런 아우구스의 핏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사건은

이 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새상 살맛안나게 만들었던

큰 이유가 되었다.

당시에 로마 상류층에는 연애 결혼이 흔치 않았는 데

티베리우스는 아내 빕시니아와 행복하게 살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피를 이어가기위한 욕심으로 그 아내와 이혼을 시키고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게 했다.

마지못해 했지만 품위가 있는 티베리우스와 외롭고 분방한 율리아 와는 맞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마음의 문을 애초에 열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떤 사료에는 전쟁중 휴가차 나왔다가 우연히 친구집에서 빕시니아를 우연히 보았다고 했다.

그 것을 알게 된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만나지 말라고 해서

피했고 빕시니아를 어느 원로원의원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그 날 티베리우스는 미친 듯 거리를 해메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에 군사적 재능과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테베리우스

만한 인재는 없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모든 것을 사양하고 로도스섬에

가서 스스로 묻혀 지낸다.

아우구스투스는 당연히 분노를 했고.

그러는 동안 율리아는 남자 친구를 사귀었고,

서로가 외로운 사람끼리 위로할 수

있는 사이로서 잘 만난 것 같은데 어쨋든 법적으로는

유부녀라 아우구스투스는 그냥 못 지나갔다.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간통법이라 지켜야만 해서 남자는

죽고 율리아는 죽을 때 까지 하인까지도 남자로는 고용 못한

채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유언으로 그 딸한테는 자기 무덤옆에도

묻히지 말게 했다.

삼류소설 같은데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그 후 티베리우스는 독신으로 지내게 된다.

황제가 된후에도.

테베리우스는 로마 대중에게 인기가 없었다.

아니 인기가 없어야 할 때 그 자리를 맡았던 것 같다.

카이사르 이후 아우구스투스까지 국토와 경제가 팽창해

나가기만 했기 때문에 조정 국면이 필요했다.

즉 긴축경제가 필요한 때에 맡은 역활을 잘 소화한 것같다.

별로 좋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하지만 책임감 하나는 제대로 있는 품격있는 사람이었다.

말년에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카프리에서 친한 친구

몇 명 불러 말동무 삼아 지낸다.

정치는 파발마를 이용해서.

그래서 로마에서는 황제가 미쳤다고 인기는 없었다.

그러나 로마전체 제국으로는 속주나 식민지 국가에서는

아주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그만큼 현실감을 놓치지 않았던 것같다.

그동안의 로마의 성장위주의 경제를 다시 한번 조아줌으로서 그 뒤에 나쁜 황제의 잘못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기반을 튼튼하게 해 주었다.

본인이 무엇을 택해야 로마가 앞으로 나을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등위에 늘 찬바람을 느끼면서도 두어깨로 로마를 짊어

지고 나갔다고 해야할 것같다.

그 주위의 몇 친구와의 담소로 충분히 보상 받았을 것같다.

아마 동양에선 이런 친구가 없어 궁녀에게만 빠지는지.

티베리우스를 떠올릴때마다 인간의 멋 같은 것이 느껴졌다.

"후세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국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평가에도 굴하지않고 해낸것도 평가해줄까.

평가햐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신전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영원히 사람들 마음에 남을 조상이다."

서기 이십오년, 티베리우스 황제는 지금까지의 업적을

찬양하며 그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우고 싶다는 원로원의 요청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의원들은 더욱 뿔이 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