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21 맘 좋은 옆집 사람같은 황제 부자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박진양 2013. 1. 6. 16:00

 

 

 

고 김 대중 전대통령이 좋아하신 티비 프로가 동물의 왕국

이라고 들었는 데 모든 권력이 그 범주에 다있다는 얘기

였다.

로마제국도 인물을 만나 잘 굴러갈때도 있고, 암만

법치국가였다고 해도 이천년전의 세계였고,

어떤때는 동물의 제국같고,

많은 황제 중에는 개망나니 같은 사람도 있었다.

물론 얼마 안가 대개는 개처럼 죽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

전체 국민의 의식이 높아서 였지 않을 까 싶다.

모든 로마사를 다 얘기할수는 없고,

내가 정말 좋아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황제를

얘기하고 정리해야겠다.

탈무드에 보면 유대국가가 로마에게 멸망을 할

최후의 순간에 랍비 한사람이 찾아가서,

상대편 장군에게 당신이 로마의 황제가 될거라고

예언하고는 부탁을 했다.

성이 함락후 조그만 교회안에 탈무드를 넣어두게만 해달라고.

그래서 탈무드가 지켜지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 상대편 장군이 베시피아누스 이고 당시에 네로 황제가

서른살이고 그가 오십여덟이라 껄껄 웃고 넘겼다고 한다.

대신 갈라리아 성을 함락시키고 얻은 이 유력자를

잘 이용하면 유대반압 진압에 잘 활용하겠다고 싶어

측근에 두었다.

그래서 칠십년 예루살렘 성 함락시 이 요세푸스라는

청년은 희생을 줄이기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리고 성이 함락후 로마에 남아 저작활동을 많이 하고

그가 유대 전쟁기를 썼다.

정통 유대교에선 그를 배신자라고 얘기하지만

그가 쓴 저술은 참조를 많이 한다.

그가 아니면 연구를 할 수없기 때문에.

이처럼 기록 또한 중요한 것같다.

어쨋든 우습잖게 들었던 예언이었는 데 몇 년후 베스파시아

누스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로마가 아닌 속주의 출신 성분도 낮은 사람이 시대가

변해서 황제가 되었다.

생긴 것은 얼굴이 찐빵처럼 생겨 옆집의 편한 아저씨 상이다.

일설에는 네로가 시를 읇는데 졸아서 좌천되어 가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에겐 아내가 죽어 독신이었고, 황후를 맞을려고 하지 않았다.

애인은 있었지만, 로마의 상류층이 아니라 노예출신의

어렸을 적 친구였다.

일상생활도 전과 다름없이 검소했다.

황제와 접견할 사람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검사하는

제도도 폐지했다.

행동거지도 새련됨과는 멀고 구태여 아는척 하지않았다.

그러나 이 시골뜨기 황제는 유머감각이 있었고,

본인의 출신 성분이 낮아서인지, 자기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만나 주었다.

어느날 소수가 된 제정타도를 외치는 공화주의자들이

황제 앞에서 공화정 복귀를 심하게 주장하자,

한참를 듣던 베시피아누스가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처형당하기 위해서라면 무슨소리든 하는 모양인데, 하지만 나는 깽깽 짓는다고 해서 그 개를

죽이지는 않소."

그 후 이 공화당파의 철학자들은 견유학파라 불리게 되었다.

그가 죽을 즈음에 벌떡 일어나서 신이 될 준비를 한다면서

서서 죽었다고도 한다.

당시에 죽은 황제의 신격화가 관례가 되어, 그의 마지막 유머였다.

요즘 태어났으면 라스베가스에서 코메디언을 하고 있을 줄 모르겠다.

하지만 베시피아누스는 단순한 호인은 아니었다.

단순한 호인은 결코 한나라를 쉽게 못 이끌어간다.

성당히 노련한 사람이었고 후계자 안정과 황제권의 법제화를 위해 황제법도

그가 만들었다.

군무를 수행하기위해 제국 전역을 돌아다닌 황제는

티베리우스이후 그가 처음이었고, 인재등용에서도

로마외의 변방의 속주 출신에도 문호도 개방했고

필요없는 지출을 줄였다.

베스파시아누스 사후에 연극에서 그의 장례식에

일천만 세라티우스가 든다고 하자 죽었던 그가 벌떡

일어나 나한테 백세라투스만 주면 시체는 테베레 강에 버려준다는 것이 희극으로 상연 되었을 정도였다.

물론 그 아들 티투스는 금지시키지 않았단다.

무엇보다 내 맘에 와닿았던 것은 황제로 있는 동안 고향도

가지않고 고향에 대한 개발을 하지않아 사후에 정적인

원로원에서 대신해서 그의 고향에다 도서관을 지어

기증했을 정도였다.

그의 고향보다 친인척보다 전체 국가를 먼저 생각했다.

그만큼 현실감각과 지극한 상식인이 그가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를 이어 받아 황제가 된 사람이 그의 맏 아들

티투스였다.

아버지를 도와 아니 실제적으로 예루살렘을 공략한 장본인이다.

그가 당시의 유력도시 시리아의 안티오키오에 갔을 때 반 유대감정이 강했던 그리스계 주민들이 유대계 주민을

추방해라고 진정했을때, 거절했다.

다시 그리스계 주민들이 로마의 명령으로 유대주민 권리를 새겨놓은 청동판을 철거 해달라는 것도 거절했다.

인종청소라는 야만적 이데올로기는 로마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이다.

반란을 했던 그 지역의 유대인만 응징했지,

다른 지역의 유대인에 대해서 전과 같은 대우를 유지했다.

베스피아누스황제도 예루살렘과 오늘날 텔아이브 사이에

있는 얌니아라는 도시에 유대문화연구소 설립을 허가했다.

로마인은 유대교를 금지할 생각도 없었고, 반유대주의도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마님 모시는 돌쇠같은 우직한 인상의 맏아들 티투스는 유대전쟁에 참전할때 유대공주 베레니케를

사랑하게 되었다.

티투스보다 열두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두번의 결혼 경험이 있었다.

베레니케는 로마장관이 유대인을 박해라도 하면 항의도

서슴지 않을 만큼 자존심이 강하고 드셌다.

지혜가 뛰어났고 넓고 깊은 교양도 갖춘 날씬한 몸매에

매너도 우아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티투스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버지와 비슷했는데

나이가 젊어서인지 어버지같은 교활함은 없었다고 한다.

요새푸스의 유대전쟁기에서 보면 티투스는 총서령관이었

는데 졸병처럼 싸우는 사람으로,

용장이기는 한데 지장이기엔 이프로가 부족했던 것같다.

순박하고 양심적인 청년이지만 냉철함이 부족해서인지

오리엔트의 아름답고 지적인 연상의 여인에게 홀딱

반했다고 한다.

베레니케도 티투스가 바치는 애정을 받아들였는데,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로마시민이 허락치 않았다.

베스피아누스가 죽고 티투스가 황제가 된뒤 구년이 지나

베레니케는 다시 한번 로마를 방문하지만 경기장에서

들었던 시민의 반대를 잊지 못한다.

유대여인은 이번에도 돌아 갈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티투스는 사랑을 성취하는 것은 체념했지만,

베레니케에게 사랑을 바치는 것은 그만두지 않았다.

베레니케와 해어진 뒤에 새로운 결혼상대를 찾지않았다.

애인조차 두지않았다고 한다.

삼십대 한 참 나이에 독신을 고수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삼십대 시절에 이런 말을 남겼다느데,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은 밑에 사람보다 자유가 제한된다"

이천년전에 이런 말을 하고 알고 있었다는 자체가

사람으로서 멋과 가능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부자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 것같다.

그중에 하나가 재정건전화를 위해 여러가지 정책중 하나가 유료화장실을 설치했었다.

이에 대해 반대파의 조소를 많이 받았지만, 베스피아누스가 "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반론으로

돈에는 귀천이 없음을 말해주는 유명한 문구가 되었다.

아들 티투스가 냄새나는 화장실에 세금을 메기냐면서

항의하자 나중에 화장실세로 받은 금화를 티투스 코 끝에

들이대며 "이 금화에서 어디 냄새가 나느냐?" 고 물었다고

한다.

물론 화장실 이용자에게 받는 것이 아니고 공중화장실에

모은 오줌을 가죽가공업자에게 펄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양털의 기름성분을 제거하기위해 인간의

오줌을 사용했다고 한다.

어쨋든 이 두 부자만 생각하면 유쾌해진다.

티투스의 애틋한 사랑도.

인간이 숨쉬는 느낌이 든다.

로마에서 가장 좋게 느꼈던 것은 노예라도 본인이 원하고

능력이 되면 노예신분을 벗어날 수있고,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가능했고,

그 것이 로마의 인재 인프라에 큰 힘이 되었다.

로마는 멸망했다기 보다 나이가 들어 스스로 자중으로

인해 내려 앉은 느낌이다.

천년을 간 로마제국이지만 이 부자가 살던 몇 백년뒤로는 이런 융통성이 발휘 되지않은 것도 쇠망한 이유가 되었던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