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로 얘기하면 카이사르는 드라이버도 잘 치고 퍼팅까지 보는 관중으로 하여금 열광하게 만드는 완벽한
타이거 우즈같은 프로골퍼이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는 드라이버는 아예 쓰지않고
아이언으로 또박 또박 파를 세이브해서 이븐을 유지하는
화려함은 없어도 신중하고 현실적 골퍼에 비교할 수있을 것 같다.
게다가 몸까지 약하고 군사적 재능도 보이지 않아
십칠세의 그를 카이사르가 보고는 동년배의 친구 군사쪽에 재능이 보이는 아그리파를 붙여 주었다.
카이사르는 십년은 더 로마의 기반을 다져주고 은퇴할
생각이었는데 암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가 세상에 나온 것이 십팔세였다.
너무나 뜻밖이라 가장 측근의 안토니우스로서는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가 보긴엔 안토니우스가 용장이긴 하지만 새 로마를 건설하긴엔 적합치 않다 여겼고,
어린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남겼다.
혈연과 지연보다 나이까지 떠나서 가능성하나만으로
로마를 맡겼다.
미소년인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선택을 입증이라도
하듯 과업을 충분히 완성한다.
이 편은 카이사르편 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샅바싸움만 하는
지루한 씨름같지만 지극한 현실감이 느껴진다.
십팔세 소년이 죽은자의 유언 하나를 밑천삼아 꿈을 이루어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는 정말 노련하다.
그리고 현실감각이 뛰어나서 세상을 잘 궤뚧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
카이사르가 대중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고 지적했다면
젊은 이 친구는 대중에게 필요한 현실만 보여주며
그만의 성을 쌓아간다.
절대 앞서가지 않고 안토니우스와 삼두정치로서 카이사르
암살자 부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궤멸 시키고,
안토니우스의 대결에서 노련함의 극치를 보인다.
불과 서른 나이에.
수를 잘 못 읽고 끼어든 클레오파트라를 이용해서 안토니우스와 최후의 대결, 옥티움해전에서 승리하고
일인자를 굳힌다.
그까지 십사년이 걸렸다.
그 동안 절대 서두르지 않고 아이언으로 골프치듯 또박
또박 실수없이 마지막 퍼팅 까지 완벽하게 해내었다.
화려한 맛이 없어서인지 더욱 현실감이 들었다.
클래오파트라는 비시 삼백년전 알렉사드로스가 이집트를
무찌르고 심어놓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녀였다.
총명하고 재치가 풍부한 여자로 카이사르의 도움을 받아
여왕에 올랐는데 현실 상황에 대한 인식은 부족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당시의 시리아처럼 속주로 만들 수있지만, 로마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로마는 군사적으로 로마의 패권밑에 들어와 있어도
그 나라의 국내정세가 안정되어 있으면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것이 비용으로 봐서도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로마는 이집트를 동맹국 대우를 했고
카이사르도 계승을 했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앉힌 것은 왕위 계승권을 가진 두 왕자와 왕녀중에
폼페이우스 살해사건에 관여 하지않았기 때문이다.
로마는 내전이 있더라도 외국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그 와중에 외국사람이 로마 사람을 죽이는 것도 용납을
하지 않는다.
진정한 자존심이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클레오파트라가 왕위에 올랐던 것을 자기의 미모
라고 착각하면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같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여자의 뜻대로 조종당하지 않기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은 잘못을 저지를 수가 없었다.
사료에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그 녀는 카이사르와
난 아들 딸과 함께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공개된 유언장에는 아들 딸에 대한 명시가 없어
여자로서의 분노와 굴욕감을 느꼈을 것 같다.
카이사르로서는 클레오파트라의 왕위가 무사하기 위해서
애인인채로 끝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같다.
이집트 왕가의 존망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집트를
군사적으로 제패할 수있었던 로마를 자극하지 않는 데
달려 있었다.
겉으로 보긴엔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그 녀만큼 부자도 없었고 당시 이집트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왕궁보다
화려한 건물이 로마에 없었고 알렉산드리아만큼 항만 시설이 잘 갖추어진 항구는 없었다.
그래서 로마 최고의 장군 안토니우스만 있으면 로마와
동방을 자기 맘대로 할 수있다고 믿었을 것도 같다.
실제로 사랑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그 녀의 충실한 애완견이 되어주었던 것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어리지만 노련한 옥타비아누스는 개인간의 투쟁을 로마와 이집트와의
국가간의 투쟁으로 바꿔서 승리를 한다.
명분과 정치력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같다.
그리고 젊은 후계자를 선택한 카이사르의 통찰력이 거둔
승리이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점 찍을 당시 군사적 재능이 없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동년배 아그리파를 붙여줌으로서
한가지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어떤 재능이 부족해도 그 것자체만으로는 불리하지않고,
부족한 재능을 대신할 수있는 사람과 협력체제만 확립
하면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혼자서 약한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정치가 필요
하다면 이런 면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 까 싶다.
어쨋든 아그리파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옥타비아누스의 충실한 오른팔 역활을
평생 제대로 하는 데서 사나이의 우정 또한 다시 느끼게 한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뽑은 왼팔로 외교를 담당한
마이케나스가 있다.
권력을 독점한뒤 삼십대 초반의 젊은 피가 로마를
새롭게 건설했고 로마에 의한 평화와 질서라는 팍스로마의 기반을 닦았다.
아우구수투스가 거둔 군사적 승리는 모두 아그리파의 전략과 지휘 덕분이었다.
아그리파는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열등감을 품지 않고
실용적인 재능으로 발휘되었다.
전선의 보조부대와 주력인 군단기지와 가도로 이어지는
로마의 도로망은 아그리파의 안목과 군단병으로 많이
건설되었고 독일의 대도시 쾰른도 그가 건설했다고 한다.
사실 유럽의 중요 대도시는 거의가 로마의 군단기지로
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같다.
군사뿐만아니라 건설에서도 두사람의 협력관계는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경쟁자를 한 사람씩 쓰러뜨리고
마침내 최후의 경쟁자 안토니우스를 쳐 부술 십년동안
비밀 교섭을 맡은 왼팔 마이케나스의 활약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개선식후 원로원으로 부터 권위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고 마이케나스에게는
문화와 홍보를 맡겨다고 한다.
후세에 문화 예술을 옹호하는 것을 마이케나스,
프랑스어로 메세나 라는 말로 표현 된 것은 이 때문이라
한다.
이 로마제국의 국부라 할 수있는 아우구스투스에게
흥미있는 한가지는 스물 네살에 첫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이름은 리비아였고 당시 열아홉이었지만 유부녀였고 애기도 세살박이 아들과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남편은 클라우디스 네로라고 클라우디스는 로마의
명문가였다.
스물네살의 젊은이는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과 직접 담판을 벌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양보를 하고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신부 들러리를 신랑이 맡은 특이한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석달후에 남자애를 낳았다.
보통 로마의 상류층에서 여자가 재혼을 하면 전 남편의
자식은 데려가지 않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세살박이
티베리우스도 갓난 아기 드루수스도 자기가 떠 맡았다.
이 부부는 당시 로마 상류층에서 보기 드물게 평생을
해로하게 된다.
첼십일곱의 나이에 아내 리비아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상속인 가운데 맨 위는 그 때 세살박이 아기 티베리우스
였고 재산의 삼분의 이를 주고, 로마 황제 자리를 물려
주었다.
그리고 삼분의 일은 아내 리비아에게 주었다고 한다.
종교 국가 유대에서 다윗 왕은 부하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백부장인 남편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 죽게 하고,
로마는 말로 담판을 지은 것도 비교할 만 한 것같다.
물론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잘 못이지만.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사십년 동안 로마의 경제 부흥과
제도 보완을 위해 소리없는 그 만의 전쟁을 수행한
성실한 황제였던 것 같다.
유서의 내용도 얼마나 꼼꼼한지 황제라기 보다 전당포
주인의 장부같은 느낌이다.
고지식할만큼 꼼꼼하고 자질구레한 데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던 로마의 초대 황제는 남의 윗자리에 서는 사람이 누구보다 법을 잘 지켜야 아래사람도 법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같다.
화려한 영웅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단점을 알고
현실을 잘 파악한 그 였다.
그리고 그 시대에 맞는 인물을 로마가 잘 만났던 것같다.
그런데 몸이 허약한 아우구스투스가 아그리파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본인도 그렇게 오래 살리라고 생각을 안했던 것같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고 선천적으로 소화기관까지 약했다고 한다.
자연의 섭리에 맞신 탓인지.
사료에는 아우구스투스는 소박하고 서민적인 음식을 좋아
했다고 한다.
집에서 구운 빵, 작은 생선, 치즈, 과일과 야채만 있으면 충분했다.
실제 편지가 몇 통 남아있는데,
"마차안에서 빵과 대추야자 열매를 몇 개 먹었다."
"가마를 타고 회당에서 집에 가는 동안 빵과 포도를
조금 먹었다."
"친애하는 티베리우스, 휴일의 유대인도 나만큼은
절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하루 동안 뱃속에 넣은 것은
저녁에 목욕을 끝내고 마사지를 받기전에 먹은 빵 두 조각
뿐이다."
로마의 초대 황제 치고는 참 소박하고 인간 냄새가 난다.
헐리우드 영화에 보면 황제는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세월 보내는 것 같은데 실제의 모습은 상식을 유지하며 사는 모습이다.
같은 인간임을 느끼게 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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