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에서 한니발을 빼고는 그냥 지날수가 없다.
한니발은 적이지만 결과적으로 로마를 진정한 강대국으로
훈련 시켜준 알리의 스파링 파트너 홈즈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포에니 전쟁은 로마에게 국가운명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천년전에 포에니 전쟁전 까지만해도 지중해의 최대 부국은 칠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카르타고 였다.
항해술 또한 뛰어나 당시 육지에만 주로 머물렀던 로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 였다.
로마의 세력이 팽창함에 자연스럽게 지중해의 승자를 가리지 않을수 없었다.
시칠리아 섬에 있던 메시나왕국에서 원조를 요청함에 따라 늪에 빠진 듯 개입되다 카르타고와 한 판 붙게 된다. 카르타고와의 승부는 바다에서 우열을 가릴 수밖에
없었는데 해운 역사가 짧은 로마로서 궁여지책이 배에
까마귀발 이라고 부교를 세웠두었다가 접근시에 찍어 내려 상대편 배에 군인이 타고 넘어가서 해상에서의
육지 같은 전투를 가능하게 했다.
로마사람은 굳이 본인이 못하는 데에 집착하지않고
본인이 잘 하는 것을 살리는 실용정신하나는 본 받을 만
했다.
카르타고로서는 최대 해운 기술을 자랑하는 터에 이상한
장식물 같은 것에 비웃었지만 그것과 같이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과
부자나라이지만 용병으로 군사력을 유지한 카르타고와
달리,
로마는 시민군이라 절심함에서 차이가 났는지 승부가
초반에는 로마가 열세였지만 결국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그것이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2) 이었다.
전쟁결과 로마는 지중해의 강자로서 팍스 로마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하밀카르의 아들 한니발이 아버지를 대신해 로마에 대한
복수를 한다고 당시에 전차 역활을 한 코끼리까지 끌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공하게 된다.
그것이 이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2) 이었다.
중국 무협영화의 왕우 처럼 로마를 휩쓸고 다녔다.
무려 십육년동안 로마의 본토를 유린했다.
처음에 몇 만명 군사라 우습잖게 보았지만 용병과 전술의
천재 한니발에게 로마는 당할 수가 없음을 깨달고 아예
지구전으로 바뀌게 된다.
그동안 로마의 희생은 엄청나게 컸고, 한니발은 그 정도
하면 로마에 관계된 속국도 들고 일어나리라 생각했는데
그것까지는 전략가로서 큰 오산이었다.
그렇게 로마가 당하면 로마 연합이 와해되리라 생각했는데 그대로 유지 되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로마의 힘이었다.
사회 계급이 고정되어있는 카르타고 출신의 한니발은
이기면 아량을 베풀어 패자까지 협력자로 만들어 버리는
로마인의 사고방식이 만들어준 로마 연맹의 결속력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같다.
돌아온 장고 같은 오기로 뭉친 사나이 한니발의 한계였고 카르타고의 한계였다.
그렇게 로마제국의 반도를 휩쓸고 다녀도
그동안 정작 수도 로마는 한 번 바라다 본것으로 지나고 만다.
물론 로마시민으로서 그 것만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로마의 도로가 워낙 잘 닦여 있어 쳐들어 가는 것도 쉽지만
로마를 포위했을 때 거꾸로 타 도시에서의 지원도 빠르기 때문에 포위를 염려하여 대도시 로마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기병과 보병의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적진을 포위하고 섬멸시키는 전술을 창안해서 실전에 잘 이용해서 승리했다.
그런데 그 전술을 상대편 로마의 애숭이 스키피오가 배워서 한니발에게 답습해서
카르타고에 쳐들어가서 자마 회전으로 마무리를 짓고
이차 포에니 전쟁은 막을 내린다.
한니발로 인해 내공이 강해져 로마 군대는 인간병기로
거듭난 것 같다.
그 때 스키피오가 도입한 접근전때 유리한 양날검이 로마의 상징이 되었다.
삼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 146)은 전쟁이라기 보다
로마의 한니발 알러지로 인한 원로원의 강박관념이
야기시킨 무익한 살육인 것같다.
무기마저 빼앗긴 카르타고가 삼년을 비틴 것만으로
경이로운 최후였다.
원로원에서도 찬반의 의견충돌이 많았다.
반대는 북아프리카의 무역기지로서의 경제적 가치와
카르타고가 없었을 때 생기는 힘의 공백을누미디아 왕국이 대신할 것을 우려했었다.
결과는 불필요한 만행인 카르타고 말살로 되었다.
카르타고를 멸망시킴으로서 로마가 얻은 것은 두번 다시
한니발과 같은 인물과 대결하지않아도 되는 것 뿐이었다.
그만큼 로마로서는 한니발에 대한 알러지가 깊었던 것같다.
그것만큼은 로마답지 않았다.
그러나 백년후 카이사르가 카르타고 재건 계획을 세웠고
실행되기전에 암살을 당했고 아우구스투스가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포에니 전쟁후 로마는 갑자기 성장을 함에 따라
성장통을 겪게 된다.
전쟁에 이긴다고 승리국의 모든 국민이 잘 사는 것이 아닌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인 것같다.
이차대전 끝나고 미국이 누린 호황도 잠깐이고
소련이 망하고 러시아로 내걸었을 때 부시가 이등국
취급하며 미국을 유일 강대국으로 치켜 세워도 결론은
경제 불황이었다.
외부의 적이 없어지면 내부의 적이 생긴다고 한니발이
예언 비슷한 말을 했다.
우수에 잠긴 고독한 영웅 한니발을 보면 영화 소재로
삼기 딱 좋은 인물이었지만 결론은 반푼수 집안 망한다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 버린것도
참 암타깝다.
로마를 괴롭혔지만 명줄을 끊지는 못했기 때문에 로마만
독하고 강하게 키워준 결과가 되었다.
구국의 영웅 스키피오도 지저분한 정적 원로원파 연설 잘하는 카토에게 환멸을 느끼고 일찍 은퇴하게 된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승전국의 큰 잇권은 부자나 요즘
대기업이 갖고 가기 마련인 것같다.
로마에 전쟁후 노예라는 값싼 노동력이 대량으로 들어오게 되고 노예을 부리는 대규모 농장의 생산성에
밀려 로마군단의 군인이 전역후 자작농으로서 고향에 돌아가서
농사를 지어도 파산을 면치 못하게 되고 실업률이 상승해
사회문제가 된다.
그래서 빵과 서커스도 제공되었지만 통 속에 누워 있어도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할 수있는 것은 철학자 디오게네스등 소수에 불과하다.
보통 사람은 일을 함으로서 사회에서의 존재 이유를 찾기
때문에 실업률 상승은 사회 불안 요소가 된다.
그래서 후에 백년간의 내전의 불씨가 되었고 그 내전은
카이사르란 인물로서 종식이 되었다면 지나친 비약이
아닐지 모르겠다.
포에니 전쟁이 끝난 몇 십년뒤 선견지명을 가진
호민관 그라쿠스가 농지개혁법을 제출했다.
농민에서 무산자로 전락한 이들에게 농지라는 재산을
주어 자작농에 복귀시킴으로서 로마 시민층의 기반을 건전하게 하고,
실업률을 구제하고 하는 동시에 사회불안을 해소하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보수파 원로원의원이 반대를 했고
개인에 대한 보조금을
국고에서 지출하면 안된다는 것이 그 이유 였다.
지금에 보면 맞는 말인데 이천 년전에야 극과 극이 존재하니깐 결국은 맞아 죽었었다.
시대를 앞서가면 순교자가 되는지.
왜 부자가 생기고 빈부격차가 생겼냐고 하면 승전국이라
돈이 남아 직접세를 거둘 필요가 없어 반사 이익을 부자가
더 보게 되고 남는 자본은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에 투자
되었고 대규모 농장은 경제 효율성이 향상되었다.
또 어떤이는 잉여자본으로 고리대금업을 했다.
나중에 카이사르를 암살한 도덕주의자 부루투스는 이율을
사십팔퍼센트 까지 받아 같은 공화정파 케케로도 혀를 찼다고 한다.
당시의 적정 이율은 십이퍼센트 라고 하는 데 누구를
위한 도덕인지 옜날 이야기 같지 않는 현실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보편 타당한 상식인이 많다는 것이
국가의 힘이 아닌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당시의 중국과 비교해보면 중국이 통일후 만리장성을
쌓았다.
쌓으면 뭐하나 싶다.
궁궐안에서 먼저 썩는 데,
생선이 머리가 썩듯이.
로마는 도로를 건설했다.
적이 쳐 들어 오기는 쉽지만 또 각 지역에서 출동도 쉽고
지원도 쉽고 원정나가는 것도 쉬었다.
즉 들어오는 것도 쉽고 나가는 것도 쉬운 개방성이 느껴진다.
단순 비교는 힘들지만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에
음미해 볼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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