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얘기

시골에 있는 식당을 정리하고 난 뒤 한참 후에.

박진양 2018. 2. 24. 04:56

지난 일년 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다.

올릴 의욕을 상실 했기 때문이다.

시골에 하던 식당을 많은 손해를 감수하고

전 사장님께 넘겨 주고 나왔다.

그나마 그만 하긴 다행이었다고 여긴다.

다시 받아준 전 식당 사장님 한테도 고맙고..

육개월 정도 하는 동안에 계속된 적자를 감당할수가 없었다.

내 능력으로 부치는 상황 이었다.

겹기야 나중에는 그래서인지 발을 삐었는데

스트레스 까지 겹쳐서 인지 악화되어

목발을 잡고 일을 하기도 했다.

참 그 때는 이 층에서 일층 내려 오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스시바에서 주방까지 얼마나 먼지

몰랐다.

그리고 하체를 받쳐 주는 목발이 고마웠고

그냥 걸어 갈수 사람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지방에서 식당을 하는 동안

혼자 생활해서 자유로울 줄 알았지만

그 조용한 시골 집의 편한 침대에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질 못한 것도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건강을 위해 술도 절제하면서

일을 끝내고 그 다음날을 위해

일찍 잠을 청해도

일찍 잔 만큼 새벽 일찍 깨어서

걱정으로 다시 잠이 오질 않아

먼동이 터오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 보곤 했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고 회상이 된다.

그 때 가족의 소중함과 함께 했던 그 따뜻함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달았다.

캐나다에서 시골에 있는 식당을 혼자 하기는 버거은 것 같다.

물론 매상이 되면 직원을 많이 채용해서 운영이 되겠지만 어중간한 매상을 올려 가며 하기엔

맨파워가 부족 했었고

부부의 합심 또한 간절 했었다.

급기야

나중에는 제발 이 상황만 벗어 나길 기도했었다.

그리고 그 때 깊이 느낀 것이 내가 그동안

편안하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소위 보시랍다고나 할까.

정말 사람이 살다 보면 안될때도 있고

실패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번도 큰 고생 안해서 남의 말 너무 쉽게 믿는 다는 내 단점을 스스로 쥐어 박았다.

한편으론 맘을 많이 내려 놓고 나니

그저

큰 것 안바라고

남의 잘 된 삶도 비교않고

내 주어진 조그만 나와바리 울타리 손질 하며

하루 하루 보내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었구나 싶었다.

그 전에는 식당 안 된 사람 보면 나랑 상관없는 듯 스쳐 지났지만

내가 그렇개 힘들어 보니

참 그 때 그 분들이 얼마나 고통이 심했을까

하는 맘이 들었다.

또 하나 느낀 것은 인맥도 다이어트가 필요 하다는 것이다.

힘든 상황에서 서로 격려 해줄 친구가 몇 되지

않는데 뭐 하러 실없는 '어장 관리 ' 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자존감은 후천적으로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서도 생겨나나 싶었다.

좀 더 젊은 나이에 경험하고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맘이 들었다.

참 이 맘 저맘 많이 든 때 였다.

어쨋든 힘든 상황에 절망하긴 보다 이겨낼려면

맹목적 의지도 필요하지만

그 의지의 바탕엔

뭔가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았다.

자기 합리화(?) 라도 해서 이겨 내어야 했고

상황을 이겨낼 에너지와 근거도 필요했다.

그래서 인문학이 위로를 주는지 모르겠다.

그 때 잠 안올때 읽은 책이 유발 하라리의

'호모 사피엔스 '와 성경책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김 상경 교수님인가 하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몇 번이나 들었고

그 비슷한시대의 철학자 들 독일 철하자 융에 대한 것 까지 많이 들었다.

어떤 개념을 목말라 했었다.

잘되면 돌아보지 않을 것들을 ..

사이 사이에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뛸 때 까지 뛰어 도망가는 영양의 모습에서

삶의 의지를 카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결국은 맘이 허허로운 가운데서

허허롭게 웃으며

뭔가 삶이 큰 것 아니라는 깨달음 뒤에

아떤 소박한 개념과 함께 굳건함이 왔다.

어느 정도의 자신감 과 의욕을 상실한채로..

그래도 크게 위로가 된 것은 여기에서 자란

우리 애들이 상당히 담담하게 받아 들이고

오히려 내게 용기를 주었다.

큰 애는 별 얘기 안하고 너무 태연하게 웃어 넘기고

둘째는 아빠는 트라이 해보다가 했기 때문에 이해를 한다고 했다.

덛붙여서 원 라이프에 이제 원 실패 인데

자기는 벌써 백번 이상 실패를 했었다고 했다.

내가 들으면서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담담히 받아들여 줘서 고마웠다.

앞으로 내만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면 되겠구나 싶었다.

물론 그 비탕엔 캐나다에서 주는 혜택이 있기 때문이었다.

교육 장학금 과 오샾등 이 있어 본인들의 의지와

실력이 있으면 대학은 문제없이 졸업하는 캐나다 여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캐나다에서 자라서 인지 낙천적이기도 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때 식당을 넘겨주고도 그 동안

리노베이션 한 것과 운영의 어려움이 있어서

재정이 악화되어

채무 상담을 받기도 했고 각오도 했었다.

그저 어떤 상황이든지 초연히 받아 들일

맘이었고

또 그렇게 맘을 낮추고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면서

문득 뒤를 돌아보니 벌써 일년 남짓 지났다.

그 또한 지나 갔네.

약간의 아픔과 함께 소박한 깨달음을 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