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애 혜진이 때문에 세인트 로버트 스쿨 가까운 쪽 스틸과 돈밀 인근으로 팔년도에 이사를
했는데 다시 다니던 예술학교 카디날카트로 전학을 갔다.
원래 오디션을 다시 봐야 하는데 바이올린으로 인정을 받았던 터라
선생님이 어서 오라고 해서 전학을 할 수있었다.
혜진이 때 시카고에 있었던 경연 대회에 학교 오케스트라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어
그 다음해인가는 미국 카네기 홀에 까지 공연을 했다.
그 때는 둘째딸 혜인이가 차세대 주자로서 연주 여행을 함께 했다.
둘다 그 학교에 다니다 보니 다시 근처로 이사를 고려했다.
그래서 이천십년도 봄에 에브뉴에 있는 식당 가까운 쪽에
아파트를 알아 보려 다녔다.
식당 근처가 학교에도 가까워서였다.
그런데 투베드룸 아파트는 많지만 스리베드룸은 흔치않았다.
큰방은 부부가 쓰고 작은 방하나씩은 애 들이 하나씩 써야
편하게 생활 하는 것 같다.
평소에 각자 악기 연주 연습도 필요해서였다.
그래서 미리 스리 베드룸이 나오면 연락해달라고 했는데
어느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 주택이었다.
렌트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서 재개발이나 투자 목적으로 사놓은 듯 했다.
그런데 지하에 먼저 사는 분이 있고
우리는 메인 플로어에 스리베드룸을 쓰면서 천오백불이면
나쁘지 않았다.
보통 아파트 렌트는 세탁기가 안에 없고 주로 지하에 있는
코인 론더리를 이용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그래서 돈을 좀 더 쓰더라도 콘도를 렌트한다.
콘도는 깨끗하고 수영장이나 헬쓰장도 있지만 무엇보다
매력이 집안에 세탁기가 있어 언제 어느때 세탁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주부의 시름을 덜게 한다.
주택 렌트도 물론 세탁기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 편하고
집 뜰도 넓어서 베트민턴 네트도 칠 수 있을 정도 였다.
아닌게 아니라 베트민튼 네트를 설치하고 딱 한번 즐겼다.
그런데 지하에도 원래 세 든 사람이 있었다.
두 분인데 오누이라고 했다.
훨씬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나이가 칠십 정도 된 신사 분은
오빠인데 미국 마이애미에서 치과의사를 하다 은퇴하고
오신 분이고 여동생되는 숙녀 분은 천구백육십사년부터
살던 이 집의 터춧대감이었다.
몇 년전에 은퇴 자금으로 이 집을 팔고는 지하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지하의 투베드룸에 천 불 정도이니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십년 된 짐이 지하의 구석 구석과 차고에
꽉 차 있었다.
조용하고 얌전하신 분들과의 한 지붕 밑의 두 가족이었다.
지하에 계신 할아버지가 밤에는 귀가 어두운지 티비를
크게 튼다는 점외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대신에 밤 늦게 애들이 바이올린 이며 피아노 연습을 해도
전혀 컴플레인이 없고, 동네 소식이며 여러가지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두 분다 백인이지만 폴란드 출신이어서 영어 액센트가
조금 특이하긴 했었다.
그래도 백인은 몇 십년 지나면 영어가 조금 서툴어도
왠지 캐너디언 느낌이 들고 동양인은 여기에서 태어나도
이민자 같은 느낌은 지울수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같다.
그 주택이 있는 베더스트 길의 서 쪽으로는 주택가격이
같은 집이라도 길 건너 동쪽 편보다 삼 사십퍼센트는
저렴했다.
참 토론토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 가격이 차이가
나고 비싼 쪽의 집을 구입해야 나중에도 잘 팔 수있는 점도
특이하다.
그래서 우리가 세들어 있는 주택 근방에는 필린핀 계통
분들이 많고 유태인 들 중에도 조금 낮은 소득 수준 탓인지
동네가 좀 산만하고 질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없었다.
이사하고 얼마 지나서인가 한번은 대문에 계란을 던지고
간 일이 있어 둘째 딸이 놀라서 그 날 밤 내가 바로 와서
몽둥이 하나를 들고 근처의 아파트 쪽을 향해 해군 하사
출신의 고함을 쳤다.
태권도 품세도 하고 몽둥이도 돌리고 별 지랄을 이삼십분
동안 분이 풀릴 때 까지 했다.
노래는 못해도 목소리가 강한 성대로 동네를 주름 잡아서였는지 그 뒤에는 별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집으로 가면서 조금 지출을 줄이려 와엠씨를 캔슬하고 밤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운동을 대신 했다.
우리 식당이 있는 에브뉴 로드를 따라 돌며 밤 거리를 순찰
했다.
마침 계절도 자전거 타기 좋은 계절이라 베낭도 메고 안전을 우선 하는 탓에 헬멭도 쓰고는 새로 상점이 나면
어떤 것을 파나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낮에 보는 것과 밤에 보는 것의 느낌이 틀리고
낮에 느낄 수없는 또다른 무엇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에브뉴 거리는 특이한 전통있는 상점이 많았다.
모자전문점, 키 백칠십이하의 양복만 파는 숏맨 전문점,
중세나 근대 또는 전세계의 군복등 용품을 판매파는 전문점, 하다 못해 우리식당 옆의 솟옷집도 토론토에서
알아주는 전문점이었었다.
그래서 보니 나도 여기에서 나와바리를 칠려면 음식도
전문화 하는 맛이 있어야 쇼부가 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밤 열두시가 넘어 페달을 밟다 출출하면 자전거를
세우고 베낭에서 비스켓을 꺼내 물고 물한잔 마시며
밤하늘 둥근달을 쳐다 보았던 생각 또한 난다.
잠시 나마 군대 동초서다 고향 생각하듯 그런 약간은
서글픈 느낌 또한 스쳐 지났던 것같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집에 오니 둘째딸 혜인이가 집안에
있던 헬쓰기구 자전거를 타며 헬멧도 쓰고 베낭도 멘
모습에 크게 웃었다.
아빠의 그런 모습을 따라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언제 부터인가 밤 열두시가 넘어 집 뒷뜰에
나가면 조그만 토끼 한마리가 나와바리를 쳤다.
여기 토끼는 한국 토끼랑 달리 앙징스러울 만큼 조그마한 해서 너무 귀엽다.
그런 조그만 토끼 한마리가 도망조차 가지 않고 빤히 쳐다
보는 모습을 친근하게 쳐다 보았다.
힘든 가운데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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