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으로 퍼 다 왔다.
이 나미 씨로 칼 융에 대해 대충 알게 되었다.
한국의 ' 칼 융' 전문가는 이 나미 씨 의 선생님 '김 부영'
씨 인데 연세가 이제는 팔십 대 증반을 넘겼을 것 같다.
아마 서울대 사제 간이시고 이 나미 또한 현재 가장 앞 서
가는 융 전문가이시고 집필 활동도 왕성한 정신과 의사도
지내신 분이다.
그래서 이 나미씨가 추천한 그 분 스승님
김 부영 씨 책도 읽어 보았지만 이 나미 씨가 쓴 ' 호랑이 를 탄
융' 이라는 민담을 소재로 한 ' 칼 융의 정신 분석학' 적
설명이 깊이 있게 와 닿아 섰다.
땅에 있는 미네랄 을 바로 소화하기엔 자신의 내공이
부족했다.
채소를 통해서 대지의 기를 흡수하듯이..
즉 학문적 관점의 김 선생님의 원론적 책보다
정신 분석학 을 공부하는 학도가 아닌 탓에
한번 더 소화 가능하게 풀이 해준 이나미 씨 책으로 솔직히 감동을 많이 받았다.
그 때 반쪽이 라는 민화에서 개성화 과정이 인생을 설명
하는 듯 했다.
그래서 막연한 개념이 요즘 와 닿는 것 같아
무엇인지 찾아 보다가 되세겨 볼만 해서 퍼왔다.
융의 개성화 개념
“개성화”(Individuation)란 용어는 1921년에 발간된 “심리학적 유형론”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삶 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하게 작용을 했던 개성화에 대한 사상은 그의 마지막 저서 “통합의 신비”(Mysterium Coniunctionis, 1995-56)에 절정에 달한다.
개성화의 목표는 인격 전체가 새로운 중심을 찾아서, 새롭게 균형 잡힌 인격의 무게 중심인 자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그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정신적인 요소들을 완성시킬 수 있으며, 자신만의 개성을 실현시킬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삶의 환경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롭게 적응 하면서 새로운 체험을 한다.” 융은 이 세상에는 개성적인 삶밖에 없으며, 그렇게 사는 것만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
융의 개성화 특성에 대하여 네 가지로2)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개성화는 사람들의 본능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개성화 과정은 자기(Self)를 페르조나가 덧씌워 놓은 잘못된 껍질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무의식으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들에 당연히 있기 마련인 암시로부터 해방시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둘째로, 개성화는 아무런 의지의 작용 없이 즉각적으로 생겨나는 인간 정신의 내면적이며 본성적인 과정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안에 타고난 삶의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이 법칙을 복종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인격, 다시 말해서 전체성에 도달 할 수 있다.” 셋째로, 자아 의식은 개성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다. 개성화 과정에서 무의식적인 요소가 비록 본격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자아의식 역시 개성화 과정의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융은 “(개성화 과정에서) 자아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자아가 어느 정도 소멸되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역할 갈등상태에 있을 때, 자아가(자기의)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결정을 따라야 할 때 뿐이다.” 왜냐하면 융에게 있어서 개성화 과정이란 무의식의 내용들을 의식에 통합시켜서 의식을 확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가 의식 세계에 닻을 내리고, 적응에 의해서 의식이 강화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
넷째로, 개성화 과정은 무의식에 대한 체험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체험에 의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모든 무의식적인 요소들에는 감정적인 특성이 있으며, 사람들이 어떤 무의식적인 요소들을 체험할 때, 정서적인 체험이 도시에 일어난다. 개성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성화는 자동성과 역동성을 지닌다. 이 개성화는 고정되어진 상태가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다. 그러므로 개성화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 이상적인 개념이다.
융의 개성화에 대한 개념은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그의 환자들과의 만남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생의 전반기는 어머니로부터 자유롭게 독립하고자 하는 자아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영웅적인 자아의 투쟁기간이다.
개성화는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에 의해서 전일성을 향해 움직인다. 이것은 인격적이며 정서적인 갈등을 수반하는 것으로, 일반적이 의식의 태도와 집단 무의식의 구분에 기인한다. 개성화는 자신의 잠재력을 성취하고자 통합 즉 전일성을 향해 움직인다. 이것은 초기에 불쾌하고 부정적인 자신의 일부를 인정하고 허용하는 것을 요구한다. 또한 무의식의 세계로 인도하는 대조적인 성격 요소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향한 개방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통합은 자기실현으로 이끈다.3)
개성화의 길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개성화의 길에는 수많은 함정과 위험이 숨어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개성화 과정에서 외부에 있는 어느 대상에 투사시켯던 정신적인 에너지를 모두 회수하면, 그의 영역 즉, 주체의 자아로 갑자기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가 몰려들게 된다. 이럴 경우, 그에게는“정신적인 팽창”이 일어난다.
융의 개성화는 개인과 타자 사이의 분리이기 보다는 오히려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 사이의 대화이다. 이것을 “좁은 의미의 개성화”라고 한다면, 자신에 대한 책임성과 과거와 미래를 향한 발발되어진 태도와 더불어 집단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넓은 의미의 개성화”이다. 여기에서의 분리는 관계성의로부터의 투사를 거둬들이는 집단으로부터의 분리이다.4)
개체가 집단의 존재 목적이나 이상에 종속되면 그는 반드시 자기 소외에 빠진다. 정체성의 상실이 일어난다. 그는 다만 외부적인 역할이나 집단의 목적과 이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존재 목적 목적과 이상을 소홀히 한다. 그러므로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은 첫째로 집단과 자신의 삶의 목표를 구별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구별은 자각된 인식을 바탕으로하여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결코 집단 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개성화는 개개인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한 바탕 위에서 집단에서 보다 나은 자기 만족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성화가 곧 사회규범을 무시한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5)
개성화 과정은 삶의 중요한 단계에서 발견되며, 때로는 운명이 자아-의식의 목적과 기대를 무너뜨리는 전환 상황에서 볼 수 있다. 자아-의식적 인격은 그 자체만의 노력으로 우리 의식에 완벽한 인간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여기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의식적 삶의 편향성이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에 의해 수정되고 보상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곧 융이 말하는 모두에게 내재하는 온전한 삶의 실현을 향한 노력이며 개성화 과정의 목표이다.
Ⅲ장 융의 개성화를 이루는 과정
자기 실현을 다른 말로 ‘개성화’라고 한다. 진정한 개성을 실현한 다는 뜻이다. 그 사람 자신의 전부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은 더 풀어서 말하면 의식의 자아가 총체적 정신 체계의 중심인 무의식 안에 자기(Self)를 만나 동화되어 가는 인격의 자기 성취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인격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즉 개인의 의식 안에 반영된 외부 세계의 요구와 집단 무의식의 안의 원형적 상징들에 투사된 내부 세계의 요구가 균형을 이루면서 건강하고 성숙한 인격이 통합되어지는 것이다.6)
융이 ‘개성화 과정’의 여정으로 설명하는 몇 가지 만남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과정으로 의식이 무의식에 위치한 원형들을 차례로 거치면서 무의식의 핵인 자기(Self)에로 접근하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원형들을 만나는 데 그것은 ‘페르조나’,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형들 중에서 중심이 되는 정신적인 전일성 또는 온전성을 나타내는 ‘자기원형’과의 만남이다. 이러한 단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부분적인 모습들과 무의식을 통합해 나가는 것이 개성화 과정의 목표이다.
1. 페르조나(Persona) 와 만남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노라면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행동규범이 있다. 이것을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페르조나’라고 부른다. '페르조나'란 말은 고대 그리스의 가면극에서 역할에 따라 썼다 벗었다 하는 탈에서 나온 이름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적 역할’과 같은 것이다.7)
융 심리학에서는 페르조나란 한 사람이 그의 외부와 관계를 맺을 때, 그 외부에 대하여 보여 주는 인격을 말한다. 이 페르조나는 우리가 자신을 밖에 보여주고자 하는 측면도 있지만 더욱 많은 경우 우리가 이미 다른 사람들로부터 규정되어 있는 자기 모습에 적응하고자 하는 측면을 말하고 있다. 페르조나는 타인의 인상에 부합시키려고 하는 자기 상이며 내가 어떻게 되어야 하겠다는 역할적, 기능적 자기 상이다.7)
‘페르조나’는 집단 정신의 한 단면이다. 그것은 흔히 개성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페르조나’는 내가 나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남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를 더 크게 생각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8)페르조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요구되는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것에 너무 동일시되면 나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패르조나로서의 삶과 자기의 본성으로서의 삶을 구별하고 페르조나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자신의 본 모습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기를 찾는 작업이 융이 말하는 자기실현이다.
예를 들면, 어느 한 젊은 목회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그가 봉사하는 교회현장에서 목회자의 역할과 기대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아마도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몸가짐, 복장, 행실, 언어습관 등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포함된다. 이런 것은 요구하는 집단에 의해서 그의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또는 밖에 요구되는 생활과 사람과의 관계를 하는 것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그 사람이 중요하게 된다. 이모든 페로조나의 일부이다. 그러나 페르조나에만 집착하면 휼륭한 목회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본 모습과 페르조나의 구별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을 잘 구별하면 휼륭한 자기실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역할과 얼굴들이 집합적으로 그의 페르조나를 구성한다. 그것은 원활한 인간관계를 맺는데 필요하며, 개인적 획득이나 성취 같은 보상이 있을 때 더욱더 강화된다. 따라서 페르조나는 위선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상황에 충실하려는 책임감 있는 심리 기제로 해석되어야 한다.9)
페르조나의 또 하나의 이점은 그것이 주는 물질적인 보상을, 정신적인 만족한 삶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데 사용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8시간 회사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회사원은 직장에서 나오는 순간 가면을 벗어버리고 보다 만족스러운 다10)른 생활을 누리게 된다.11)
더러는 하나 이상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는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교회에 가거나 친구들과 사귈 때, 그밖에 여러 모임에서 제3의 가면을 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모든 가면을 하나로 합친 것이 그의 페르조나이다. 그것이 다른 곳에서는 서로 다르게 작용할 뿐이다. 물론 이 적용이 사회 생활의 중요한 요인인 것은 전부터 늘 인정되어 왔지만, 그것이 타고난 원래 모습의 표현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융 이전에는 없었다.
인격에 있어서의 페르조나의 역할은 유익할 수도 있고, 유해할 수 도 있다. 개인이 자기가 연출하고 있는 역할에 너무 말려들고 사로잡혀 자아가 이 역할과만 동일화하기 시작하면, 그의 인격의 다른 측면은 제거될 것이다. 이와 같이 페르조나와 압도된 사람은 자기의 본성에서 소외되고, 지나치게 발달한 페르조나와 아직 발달되지 않은 인격의 부분이 갈등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긴장 속에서 살게된다. 자아가 페르조나와 동일화되는 것을 자아 팽창(自我膨脹)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되어야겠다는 모습을 현재 자신의 모습인 양 착각하는 것이다. 이 동일화가 심해지면 결국 그 사람의 자아는 내적 정신 세계와의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되고 그 존재조차도 잊어 버리게 된다.12)
한편 이러한 사람은 자기가 대단히 역할을 잘 한다는 생각에서 지나친 자존심을 갖는다. 그는 강요하기를 좋아한다. 그리하여 그 역할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投映)하여 같은 역할을 하도록 요구한다. 높은 지위에 있으며 그는 그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비참하게 만든다. 자기의 페르조나를 자식에게 투영하는 부모도 있는데 그 결말은 불행하다. 개인의 행위와 관련된 풍습이나 법률은 집단 페르조나의 표현인데, 이것들은 개인의 욕구를 무시하고 획일적인 행동 기준을 집단 전체에 강요한다. 정신적 건강에 있어서 페르조나의 팽창은 이처럼 위험한 것이다.
페르조나는 하나의 가면과 같아서 그 가면 뒤에 있는 초라한 본성을 은폐시키고 감추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것이 탄력성과 투과성을 잃을 경우에는 정신장애가 유발된다.13) 그러므로 페르조나는 무조건적으로 동일시하게나,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 모두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페르조나’는 가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없애야 할 것이라기보다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페르조나’ 자체가 나뿐 것이 아니라 ‘페르조나’와의 맹목적인 동일시가 문제되는 것이다. 사회적 역할, 의무, 도덕규범, 예의범절, 이러한 것을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맹신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가거나 어떤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수행하는 것이 페르조나와의 맹목적(의무적인)인 동일시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단언하기 어렵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의 가야 할 길, 그 자신의 길일진대 그에게 있어 개성화란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럴 때 그것은 동일화가 아니라 자각된 선택이다. 페르조나의 무조건의 거부나 다른 것으로서의 대치는 결국 그의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그것으로 인해 다시금 제약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14)
인생의 전반기의 주된 역할은 세상에 적절하게 살아남기 위한 역할로서의 페르조나를 발전시키고 분화시키는 것이다. 이 페르조나는 인간과 사회와 연결시키는 사회적 또는 외양적인 인격의 표현이다. 즉, 인격의 인위적인 한 쪽 측면만을 발달시킨다. 따라서 인간의 진실한 본성은 페르조나-가면-에 가려지고, 자아가 추구하는 이상을 거부하거나 억압하게 된다. 그림자는 바로 거부되어진 또는 어두운 측면으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이런 측면을 다음절에서 살피려 한다.
2. 그림자(Shadow)와 만남
융의 심리학적인 의미에서의 그림자(Shadow)란 바로 '나'(自我)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 측면에 있는 나의 분신이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되면 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지게 마련이다. 이것은 의식의 바로 뒤편에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내용으로 의식될 기회를 잃었으므로 미분화된 채로 남아 있는 원시적인 심리적 경향, 심리적 특성들이다.15)
융의 수제자인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M. L. Von Franz, 1915-98)는 취리히의 연구소에서 행한 ‘민담에 나타난 그림자와 악(惡)’이란 강의 중에 융이 말하는 그림자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6)
“융 심리학에서 우리는 대개 그림자를 무의식적 인격의 한 측면으로서 자아 콤플렉스에 보태질 수 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되지 못한 부분이라고 정의한다. 그럼으로 그림자는 자아 콤플렉스의 어두운, 아직 살지 못한, 억압된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부분적으로 타당할 뿐이다.”17)
무의식에 있는 ‘좋지 않은’ 성격 부분, 곧 ‘열등한 무의식적 인격’을 분석심리학에서는 ‘그림자’라 부른다. 이것은 도덕적으로나 감각적․감정적으로 열등하고 유치한 성격 부분으로 자아의식이 고상하고 높은 인격을 지향하다 보니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억압되어 형성된 또 하나의 ‘나’ 또는 무의식에 있는 ‘나’의 동반자이다. 우리는 모두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무엇인가 추구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그것은 의식의 특징과는 달리 선량하고 좋은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기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인격성숙에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내가 남들에게서 보고 비난하는 ‘좋지 않은’ 생각이나 욕심이 내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성숙된 인격의 첫 조건이다.18)
폰 프란츠는 융이 말하는 개념의 기본 정신을 매우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융은 여러 곳에서 그림자는 일차적으로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으로서 무 의식의 의식화에서 비교적 쉽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러나 원형으로서의 그림자는 꿰뚫어보기가 어렵다는 말을 함으로서 그 림자 개념이 개인적 무의식뿐 아니라 집단적 무의식에도 적용됨을 명시 하였다.”19)
그림자는 다른 어떤 원형보다도 인간의 기본적인 동물적 본성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원형 중에서도 가장 강하며,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하다.20) 그러나 그림자는 본래부터 악하고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늘에 가려 있어서 다시 말해서 무의식 속에 잠겨져 있어서 기회를 잃었을 뿐이며, 그것이 의식의 햇빛을 보는 순간 그 내용은 곧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융은 자기 실현의 첫 번째 단계를 이 그림자를 의식, 분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1)
그림자는 자아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어두움이 짙어지게 된다. 위선자라든가 이중 인격자란 바로 자기 마음속의 검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의식과 무의식의 좋은 예이다. 하이드는 의사 지킬의 그림자라 할 수 있다. 민간설화에 나오는 대극적 인물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가짜와 진짜’ 등 무수한 쌍들이 바로 인간정신의 의식성과 무의식성, 명(明) 암(暗)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쌍은 보다 신화적인 서양의 문학 작품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펄레스’ 등은 모두 그림자들이다.22)
그림자의 나쁜 요소는 무의식 속으로 감추어져있을 뿐 의식적 자아 속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가는 한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데, 그림자는 의식에 가까이 있으면서 자아가 모르고 있는 무의식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무의식에는 어두운 측면인 그림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창조적 능력, 즉 빛의 원천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의 전체성이란 빛과 그림자의 융합으로 이루어진다. 겉보기에는 열등한 그림자 속에 또한 창조와 성숙의 씨앗이 있다는 점을 융은 강조한다.
그림자가 긍정적인 측면을 띠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 의식의 좋은 면이 억압되었을 때 '나'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좋은 것'은 남에게만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그림자를 억압할 때 그것은 위기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기도 하고 대개는 외부에 투사된다. 이것은 남의 눈에 티를 보면서 자기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23)
투사란 물론 자아가 하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되는 것이어서 자아는 단지 투사된 대상에 감정적으로 집착하게 됨으로써 어떤 무의식적인 내용이 투사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림자가 투사될 때 사람들은 ‘왜 그런지 모르게’, ‘공연히’, 어떤 대상에 대하여 혐오감이나 그 밖의 부정적인 감정반응을 일으킴을 알게된다.24)
그림자는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어 살다가 보면 그 무리에 공통되는 가치판단의 기준을 만들게 되어 이 기준에 맞지 않은 것은 모든 의식에서 빼돌리기 때문에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 집단에 공통된 그림자를 무의식 속에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인 그림자의 투사가 흔히 가까운 동류의 사람에게 향하듯, 집단적 그림자의 투사도 가까운 집단, 비슷한 성격의 집단간에 일어난다. 비단 한국 안에서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이북사람 집단적인 편견을 갖게 되는 경우도 부정적 명암을 띤 무의식적인 그림자의 상호투사가 일어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25)
투사 현상에서 하나 예를 들면, 반기독파였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환영을 보고 기독교인이 된 예는 융에 의하여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 예이거니와 그는 마음속의 반 기독교적 그림자를 줄곧 투사해 오다가 자기원형에 의해 그것이 지양되면서 커다란 의식의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마귀라 비난하는 사람 가운데는 그 무의식에 ‘마귀’ 그림자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26)
그림자는 보통 개인적 무의식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때로는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인 원형의 상을 띤다. 전쟁이라는 대량 학살의 현상은 원형적 그림자상의 집단적 투사를 바탕으로 실시되는 참극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고 귀신이나 마귀로 보이거나 괴물로 보일 때, 혹은 하잘것없는 파리 새끼 정도로 보일 때, 인간은 인간을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27)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 속에 살고 있는 동물은 억압되면 더욱 야수적으로 될 뿐이다. 기독교만큼 무고한 백성들이 흘린 피로 얼룩진 종교는 없고, 세계사에서 기독교 국가의 전쟁만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28)
이러한 관찰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림자에 대해 대단히 억압적이다. 이러한 전쟁과 그 밖의 역사상의 무수한 사건에서 억압된 그림자가 반격을 취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유혈의 심연 속에 빠뜨렸던 것이다.29)
융의 그림자원형이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융은 어떤 심리 내용을 고정불변의 틀에서 규정짓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림자 개념도 그것이 그림자로서 선의 기능에 대응해서 악의 기능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기능, 또는 창조적 기능으로 바뀔 수 있는 요소라고 보는 것이다. 창조적인 기능이 억압될 때 파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원형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즉 창조적 측면과 파괴적인 측면이 있다. 인격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자기원형에도 그림자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파괴적이며, 위협적이며, 부정적인 작용을 나타내는 그림자를 창조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 그 열쇠는 자아의식이 무의식에 대하여 어느 만큼 관심을 가지고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고자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다든가 투사된 그림자를 자아에 나의 일부로 소화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내 안에 비난하는 열등한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진정으로 내가 그림자를 의식의 일부로 소화, 또는 동화(同化)시 킬 수 없다. 그림자가 ‘나’의 일부가 되려면 ‘내’가 그림자를 살려야 할 것이다.30)
그림자가 원형과 관계될 때는 좀처럼 의식화가 어려워진다. 그것은 거의 하나의 자연적인 조건이며 인간본성에 포함되는 원초적 특징이다. 이때 우리는 종교성(religio), 주의 깊은, 성실한 관조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림자 원형은 우리가 의식에 동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없애거나 그리하여 하나도 티없는 사람이 되려는 것보다 인간의 마음속에 얼마나 무서운 그림자가 있을 수 있는 가를 직시하는 것이 심리학적인 의미에서 성숙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31)
인생의 후반기의 주된 목표는 바로 무의식의 그림자와 의식의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 여태까지 선택하지 못했던 삶의 재통합에 대한 과제가 걸려있다. 따라서 그림자는 ‘다른 측면’ 또는 ‘어두운 형제’를 상징하는 인간의 심혼(心魂)을 분리시키지 않고, 각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이것이 분리되지 않을 때, 이것은 악의 근원이 된다.
그림자는 본래부터 그렇게 악하고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늘에 가려서, 즉 무의식 속에 버려져 있어 분화될 기회를 잃었을 뿐이다. 그것이 의식되어 햇볕을 보는 순간, 그 내용들을 곧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림자의 부정적 측면은 대개 상대적이다.
융은 개성화의 과제가 전 생애를 걸쳐서 계속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우리 자신들의 투사들을 계속해서 철회할 때, 우리는 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의 여러 측면들을 인식하게 되고 그것들을 창조적으로 수용하게 성숙의 단계인 개성화 과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3.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와 만남
융은 인간의 내적 인격인 무의식의 심상이 남성과 여성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심리적, 생리적 특성과 사회 문화적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 란 무의식에 있는 내적 인격의 특성을 말하며 간단히 말해서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라고 하고,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라고 부른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의 외적 인격으로서의 남성과 여성은 각기 다른 내적 인격의 특성을 갖추게 되고 이것이 전 인격에 보충됨으로서 하나의 개체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고도의 자율성을 지닌 요소로서 신성성(Numinosum)32)을 지니고 있다. 즉, 이러한 내적 인격은 외적 인격 때문에 생겨난 산물이 아니고 본래 그렇게 체험하게끔 준비된 원초적인 조건, 즉 원형이다.33)
융에 의하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인류가 조상 대대로 이성에 관하여 경험한 모든 것에 침전물이다.34) 이 이미지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연인에게 투사되어 정열적인 매력 또는 혐오감에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아니마는 남성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여성적 심리 경향이 의인화된 것으로서 그것은 막연한 느낌이나 무드, 예감, 비합리적 것에의 향수성, 개인에 대한 사랑의 능력, 자연에 대한 감정 그리고 무의식과의 관계이다.35)
아니마의 원천에는 어머니의 영향력 이외에도 유전으로 물려받은 이미지가 있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종족 관념으로 과거의 여성에 대한 남성의 경험으로부터 파생되었고, 마침내 인격의 일부로 자리잡은 것이다. 물려받은 여성 이미지는 남성의 무의식 속에서 항상 아니마 이미지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러한 아니마상은 남성에게 있어서 제일 먼저 어머니로부터 받으며, 그 후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던 그에게 환상을 불러일으켰던 여러 여성들로부터 받게 된다. 아니무스는 아니마처럼 에로틱한 공상이나 무드에 형태를 취하는 대신 오히려 숨겨진 성스러운 확신의 형태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36) 이 아니무스는 영웅적, 지적, 예술적 또는 운동가다운 명성이 있는 남성과 동일화하려고 한다. 아니마의 최초의 투사가 어머니에 대해 행해지듯이 여성에게 있어서 아니무스의 최초의 추사는 아버지에 대해 행해진다.
아니무스의 부정적인 모습은 죽음의 화신, 도적이나 살인자의 역할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아니무스는 잔혹성, 무모성, 공포, 침묵, 완고성, 사악한 사념 등과 같은 부정적인 성질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무스는 긍정적이고 가치 있는 면도 지녔고 자체의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자기'(self)에 이르는 다리를 놓을 수도 있다. 아니무스의 긍정적인 면은 기획성 이라든가, 용기, 진실성을 그리고 최고의 형태에 있어서는 정신적 깊이를 인격화 할 수 있다.37)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의식되어 분화되지 못할 경우, 그것들은 부분 인격이기 때문에 열등감을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양자는 인간의 인격에 열등한 남성, 열등한 여성으로 나타나 사람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것이 의식되지 않아 외계에 투사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아니마와 아니무스상을 자신의 속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관심을 계속 밖으로 돌리게 된다.38)
그러나 인격의 성숙은 자기 의식에 부족한 것을 자기 안에서 찾아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정화시키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 속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찾아 그것과 친숙해지고 그 영향력에 휩싸이지 않게 할 때 더욱더 성숙한 인격을 갖추게 된다. 페르조나가 자아와 외계 사이를 중재하는 기능이듯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자아와 내면 세계를 중재해 주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이성적인 실체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며 전인성을 향한 인간의 역점에 상당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인생의 후반기, 즉 36세 이후의 시기부터는 억압되어 온 아니마의 보상(補償) 시도가 특별히 중요하다. 삶의 전반기 동안 남성은 가족이나 기타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적응을 필요로 하는 사항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경력을 쌓아간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분명하게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의 아니마는 여성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로 인해 쉽고 자연스럽게 표현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니마가 존재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이런 방식이 점점 고착되면 그의 인생은 파국을 맞게 된다. 남성은 자신의 정상적인 기질, 즉 아니마를 무시함으로써 파국을 맞게된다.
융의 의하면 개성화는 성(性)의 대조적인 관련성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전체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다 대극으로서의 성적인 심리의 전체서의 영역을 가로질려야만 한다. 모든 인간 존재는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두 개의 성(性)을 지니고 있다. 이때 주로 지배적인 요소가 성을 결정한다. 발달과정에서 의식은 남성과 여성으로 분화되어 대극의 하나로 이해되어진다. 만약 의식이 남성이라면, 여성은 무의식이다.
이 두 가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특징은 그 사람의 임기응변적․이성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인생 속에서 지닌 또 다른 한쪽의 성(性) 대표자와의 체험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이와 같은 요인이 하나의 것으로 응축된다. 그것들은 단순한 이미지나 체험이 아니라 일종의 존재이다. 그 작용은 다른 정신 기능에 유기적으로 편입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4. 자기(Self)와 만남을 통한 자기실현
‘자기’(Self)란 자기실현의 종착역이자 시발점이다. '자아'가 의식적인 인격의 중심인 것처럼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합친 전체 정신의 중심을 유도하며 하나로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그것은 인격성숙의 목표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공통되는 중간 지점을 통하여 이러한 양극을 두 개의 심리 조직인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인도하는 원형적인 심상은 '자기'이다. 이것은 융이 '자기 실현'(Self-Realization)이라고 부르다. "개성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자기원형을 만나는 지점이다.39)
대개 성격의 중심을 자아로 말하는데, 자기 원형을 만남으로 인해 자아는 자기로 대체된다. 따라서 인격의 중심은 자아가 아닌 자기이다.
자기란 의식과 무의식을 합쳐 하나가 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단순 명료한 논리가 아니라, 남과 다른 면도 있고 동시에 같은 면도 있으며 합리적이기도 하고 반대로 비합리적이기도 한 "대극의 일치"를 포괄한다.40)
인간에게는 전체로서 살 것을 스스로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그 자신으로서 살지 않고 그의 어떤 한 면만을 내세우고 살면 언젠가는 그의 다른 면이 그의 삶의 일부를 마쳐 참여시켜 주기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아가 의식에만 집착하면 무의식은 보상 기능을 발휘하여 의식에 포함되어 전체가 되려고 한다.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심층에는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가 되게끔 하려는 원동력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41)
그가 사회와 이웃과 다른 사람의 투사와 기대에 의하여 만들어진 '탈'(persona - mask)이나 자아의식에 집착하여 좁고 경직된 역할 속에 기계적인 인생을 보내지 않도록 그로 하여금 주어진 전 생명력을 불태우도록 촉구하는 무의식의 힘, 그것은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 아닌 그 자신의 '전체'가 되도록 자극한다. 이것이 바로 융이 말하는 자기 원형(archetype of self)의 기능이다.42) 자기란 의식과 무의식을 통튼 하나인 그의 전부를 말한다. 이것이 원형으로 다루어지는 이유는 전체가 되고자 하는 기능이 원초적으로 인간에게 조건 지워져 있다는 견해에서 온 것이다. 즉 인간의 무의식에는 누구에게 나 언제나 전체가 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다. 융에 있어서 전체성(wholeness)은 의식의 인간뿐 아니라 그림자, 아니무스, 아니마, 페르조나 등 무의식의 모든 속성을 포함한 전체인 것이다.43)
전체가 되고자 하는 경향이란 분열을 지양하고자 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이 일방적으로 의식만을 고집하면 자기로부터 멀어지며 결국 무의식과의 의식적인 관계가 상실된다. 그것은 두 개의 정신세계의 분열을 뜻한다. 무의식은 이러한 단절 상태를 견디지 못하여 이 단절된 마음을 이으려고 애쓴다. 흔히 사람들이 정신적인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자기원형 상이 출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44)
자기란 글자 그대로 그 사람 자신을 말한다. 어느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 전체'를 말한다는 뜻에서 진정한 의미의 개성(individuality)과 같은 말이다. 이 개성은 의식에 나타난 있는 '자아'의 일회성이나 특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무의식을 통튼 전체로서의 그 사람의 전 상품을 말한다.45)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 자신이 되게끔 하는 능력이 바로 자기 원형의 기능이다.
자기는 상징을 통해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만달라(mandala)인데 만달라는 원과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고 그 중앙에 최고의 원리를 상징하는 상(象)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원은 인간의 영혼이나 인간의 마음의 전체 혹은 핵심을 나타낸다. 융은 이 만달라 그림이 인간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그들 마음에 균형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46)
융은 그리스도로 인격화되어 나타나는 상징을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여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로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삶은 언제나 모든 사람의 삶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며 독특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하나의 원형적인 삶으로서,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47)
자기 원형의 상은 원과 사위(四位)와 같은 것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인격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종교에서 '신'이라 부르거나 최고의 진리로 삼는 상들은 자기 원형상 들이다. 이러한 인격화된 상은 부처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산신령 같은 노현자(老賢者), 때로는 '어린이'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또한 종교에서 보는 신성혼(神聖婚)은 대극의 일치의 전형적인 상징의 표현이다. 이런 것은 언어의 표현 한계 밖에서 인간의 온 정신이 참여하는 커다란 체험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48)
무의식의 내용을 깨달아 누구에게나 일정한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구조에서 말한 여러 가지 내용들, 즉 그림자, 페르조나, 아니마/아니무스의 의식화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그 개체는 전체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림자의 의식화는 비교적 쉬운 편이므로 성숙한 단계의 사람이라 할 때는 대개 여기까지는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림자 다음에는 남성에 있어서는 사랑과 감정의 분화, 여성에게는 정신적인 지혜의 발달이라는 과제 앞에 서게 된다.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이나 여성으로서의 열등감, 합리적 사고에 대한 과도한 집착, 또는 감정에만 치우칠 때 아니마/아니무스의 의식화를 통한 분화 작업은 어려움에 부딪친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자기실현은 일반적인 원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따라 그 과정과 그때 그때의 과업이 다르게 마련이다.49)
이렇게 무의식의 의식화가 진행되면 결국 무의식성이란 없어지고 완전히 깨달은 상태가 되어 전인(全人)이 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무의식은 끝없는 세계이다. 아무리 의식화해도 미지의 세계는 남아있게 마련이다. 자기는 언제나 ‘나’(자아)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융은 자기실현은 반드시 완전해지는 것이기보다 비교적 온전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실현은 한 인간의 과제일 뿐 아니라 전 인류의 과업이다.50)
융이 말하는 개성화 과정은 무의식의 창조적인 힘을 활성화하여 이것을 의식적으로 정신 전체에 통합시킴으로써 분열되지 않는 한 개인의 탄생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결코 유쾌한 작업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전혀 자아의 욕구나 의지에 반하여 실천되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은 쉽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도 이 목표를 완전히 달성한 사람이 없는 매우 길고 어려우며 힘든 과제이다.
개성화의 여정은 한 인간이 그의 전 존재를 바쳐 성취해야 할 삶의 과제이며 그 길은 한평생이 이루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Ⅳ. 나의 자기실현 과정
개성화 과정이 비록 한 개인이 본래 타고난 자신의 본성을 되찾아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그가 개인주의자나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보다 더 높은 자신의 독특성을 찾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융은 개성화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이점에 관해서 융은 개성화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다른 측면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내면적이며 주관적인 통합을 이루는 과정이고 , 다른 한으로는 객관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이 두 과정은 개성화 과정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과정 이다고 주장하는 한편, 내면적인 통합을 이루는 것은 개인이거나 이기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영역에 있는 어떤 최고의 실재를 실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란 그의 자아와 초개인적인 무의식을 통합하는 것이기 때문이 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성화 과정에서 이 두 가지 측면 가운데 어느 한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서는 곤란하다.51)
1. 나의 성장과 페르조나의 형성
2. 나의 어두운 그림자와 만남
3. 나의 아니마와 만남
4. 자기(Self)실현(개성화, Individuation):통합
개성화 과정의 목표인 자기(Self)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는 것이다. '자아(ego)'가 의식적인 인격의 중심인 것처럼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을 합친 전체정신의 중심을 유도하며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공통되는 중간지점을 통하여 이러한 양극을 두 개의 심리조직(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인도하는 원형적인 심상은 '자기'이다. 자기 자신과 조화되어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自己)가 자연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않고, 순전히 인간 정신의 내면적인 차원에서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52)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자신에게 도달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에게 영적인 삶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53)
이것은 융의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이라고 부르는 "개성화 과정"의 마지막 지점인데 이준묵에게는 내면화를 통하여 영적 성숙으로 나타난다.
융은 사람의 삶의 단계를 두 단계로 본다. 첫단계는 태어나면서 35세까지를 인생의 전반기, 두 번째 단계는 35세 이후부터 죽을 때 까지의 인생을 후반기라고 설명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적 입장에서 나의 자기실현은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겨우 전반기 인생을 끝내고 겨우 후반기 인생이 시작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과거에 인위적인 자기실현을 위한 몸부림을 쳐 왔다면 이제는 내 자신의 내적으로 말하는 자기실현을 위한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에는 공부를 해서 목적을 지향하고 성취를 통해서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끈없는 노력을 왔다. 나는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 한체 20때부터 자기실현을 위한 과정으로 들어서기 위한 몸부림 이었다고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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