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칠년도에만 해도 여권이 쉽게 발행되지않고
노 태우정부가 들어서면서 여행자유화가 되었던 것같다.
여권을 받으면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해외로 나가서 지켜야할 기본적인 매너교육이랄까.
파키스탄정부로 부터 등반허가서도 받았고,
대한산악연맹에서 해외원정에 대한 이틀간의 세미나도
참석을 했다.
히말리야및 남미의 안데스 산맥, 그리고 유럽의 알프스
까지 각 부분의 전문가와 다녀오신 산악선배님이 직접
강의를 했다.
그 때 남미의 트랑코타워도 등반 욕심이 났다.
그리고 포항제철 회사로 부터 두달반의 파견근무 형식으로 히말리야 등반에 대한 허가도 받았고
사백만원의 지원금도 나온다고했다
원정대 팜플렛에 내 사진을 보고는 진짜 가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버님께도 허락을 못 받고 어머님께서는
아예 자살한다고 그래서 도저히 뿌리치고 갈 용기가
안났다.
그리고 그 전해에 두달동안 병가를 다녀와서
또 자리를 비운다는 것도 부서장님과 직장동료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선에서 포기하고 동기 종철이가 대신
들어가서 라키오트 피크 원정을 다녀왔다.
나는 암벽에 전념하고 팔십팔년도 전국암벽등반대회가
전라도 영암 월출산에서 열렸는데 산악회를 대표해서
참석했다.
경북 대표라 같은 대표 대구 산악회 회원들과도 조우해서
돈독히 했다.
회사 친구 안병조씨의 봉고차를 빌려 향로산악회 대우랑
같이 다녀왔다.
대우는 향로의 새로 떠오는 별이고 암벽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 후에 포철을 퇴직하고 실내암장을 열고 프리
클라이머의 길을 걸었다.
영암까지 물어 물어 찾아가는 길이 또 하나의 모험처럼
재미있었고, 전라도 분들은 정말 친절하고 인심이
좋았다.
밤에 도착했다가 아침에 본 월출산의 산세와 경치에
반해서 한참을 쳐다 보았다.
예선전 당일 비가 부슬 부슬 내려 봉고차 뒷문을 열어 우산 삼아 코펱에
밥을 지어먹었는 데 운치가 있었고 소풍온 것처럼 들떴다.
올해는 뭔가를 보여 주리라고 결심을 했고 서울에서
활동중이던 오환씨를 만나 회포도 풀었다.
부산대륙산악회 꿈나무 선수와 회원들도 많이 왔었다.
예선전을 하는데 비가 와서 암벽이 무척 미끄러워
출발후 이미터 오십전후에서 거의 다 떨어졌다.
이미터 사십센티만 넘어도 본선에 나가는 정도까지 되었다.
내심 저정도는 충분히 넘을 꺼라고 생각했는 데 나도
해보니 상상외로 미끄러워 그만 이미터근방에서 슬립을
해서 황당했다.
그 때는 창피보다 당황스러웠다.
산악회에서 준 출전비도 있었는데.
그래서 또다른 후배를 위해
마지막까지 다 지켜 보았다.
다른 선수들도 남들 떨어질때 웃다가도 막상 본인이
슬립을 하면 믿을수없어 황당해 했다.
다음날 본선에서 일등은 나이가 사십다된분이 해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등은 김동칠씨가 했는 데 온사이트 등반을
했기때문에 사실상 일등이어서 나중에 약간의 잡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향로산락회 대우와 대구에서 온 산악회원과 함께 전날 예선전이 열렸던 곳을
등반해서 원을 풀고 월출산의 다른
코스도 등반하고 밤에 같이 모여 캠프파이어도 하고
술도 거나하게 같이 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또 예선 탈락을 해서 산악회에 얼굴보기가 좀 미안 했는데 얼마후 포항제철
주관으로 오리엔트링 대회가 열렸다.
각 산악회에서 다섯명이 한 조이고 조장이 이론시험도
치고 여성 회원도 두명이 들어가야했다.
대회 당일 비상계획부에서 온팀은 덩치부터 기를 죽이고
보기엔 우리산악회팀이 초라해보였다.
많은 팀 중에 다행히 내가 조장으로한 고룡산악회가 일등을 하고
상금 오십만원을 타서 보경사 입구의 우리산악회 단골
가게 옥상에서 전 회원이 모여 잔치를 해서 체면을 살려
주었다.
그리고 그 전후로 해서 산악회 활동은 슬럼프를 겪고
제철산악회 철명이 권유로 스쿠버다이빙팀에 들어
그 팀의 견인차가 되었다.
고룡산악회는 그 해 원정을 성공적으로 다녀오고
이 년 뒤 쯤인가 그 전 부터 활동했던 베테랑 산악인 김 병석씨가 포철에
입사하면서 권 오수, 장 이석, 문 인주등 여러 후배가 성장하면서
르네상스 시대를 연 것 같다.
히말리야의 추렌히말, 가셔브룸투, 낭가팔르밧, 얼마전에는
에베레스트 원정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원정은 못 갔지만 산을 통한 도전정신은 나의 멘토가 되어 어쩌면
이민까지 온 것같다.
인생이라는 산에서 이민이라는 또 하나의 루트를 개척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받아들일 것같다.
등반중에는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믿고 올라가다보면 언젠가 정상에 선다고 믿는 것이 등반이다.
두해전인가 아내 친구분이 한국에서 와서 우리 사는 것을
보고 포철 다니고 있었으면 지금쯤 호강하고 살텐데
개고생한다고 얘기를 했다.
그래도 산을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남들이 히말리야간다고 하면 와! 그러지만
실제로 얼마나 힘들고 오랜 시간 준비와 사적 생활의
희생이 따라야 하는 줄 알기 때문에 부러워하기보다
그 긴 시간의 과정에 선후배를 떠나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산에서 그 나이에 매트리스 하나깔고 우모침낭
뒤집어 쓰고 입김으로 얼은 뻐등 뻐등한 침낭속에서
겨우 잠이 들면 바로 새벽이라 일어나야 하는데
정말 어느새 따뜻해진 침낭에서 나오기 싫다.
훈련 도중 아침에 일어나 뻣뻣해진 몸을 커피한 잔으로
녹이는 것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불편한 잠자리만 생각해도 힘들고 척박해서 찌질하더라도 집에서 자는 침대의
현실이 가장 화려한 등반보다는 나은 것같다.
조금 잘살고 못살고는 살다보니 별 것도 아닌 느낌이다.
그래서 여러가지에서 산으로 많은 위로를 받는다.
산을 추억하고 산을 적다보니 내 삶은 산이 멘토였다는 생각이 든다.
산다니며 베낭 세개이상 안가질려 했는데 그 때를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엄청난 부자가 된 것같다.
이번 기회에 산행을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한 십년뒤에 차형이랑 히말리야에서 만나 트레킹을 하는 꿈을 가져 본다.
흰산을 바라보며 위스키 한잔 마시며 지난 삶을 얘기하겠지.
꿈은 이루어 질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