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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려한 병가

박진양 2012. 12. 2. 07:55

 

 

 

 

 

 

 

 

 

 

 

 

 

암벽에 입문한 이후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갔다.

그러던 사이에 체력도 좋아지고 일년이 지난 쯤에는

체격도 좋아졌다.

암벽등반시에는 커지는 근육이 불리해서 다이어트 하다며

심한 운동량에 비해 먹는 것에 소홀했다.

육십오킬로 되던 체중이 오십오킬로 까지 내려 가니 날라

다닐 것까지는 좋았는 데 직원 건강검진 때 보니 결핵 진단이 났다.

포항제철한테 좀 미안했다.

회사일에 열심이어서가 아니라 아침에 기본 십킬로씩을

내 목적을 위해 뛰어 다니면서 먹는 것에 소홀히 해서 병을

얻었으니.

회사의 담당의사는 무존건 두 달 쉬면서 잘 먹고 차도가

없으면 또 쉬어야 한다는 말씀에 덜컥 겁도 났다.

일제 시대 이 상등 많은 문인들이 결핵으로 유명을 달리한.

피를 쏟았다는 그 것이 나에게.

회사의 경험있는 선배님은 고향에 가서 개고기 먹고 쉬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증세는 느낄수 없는 엑스레이 사진 상으로만

미미하게 판독되는 아주 초기여서 약만 잘 먹어도 된다고

해서 약타서 이 기회에 등반을 좀 해보자는 생각이 먼저 났다.

포항 보건소에 약 타러가니 우리 산악회 부회장 금 누님이

담당자였다.

그런 여타일로 약타러 오시는 노인 분들에게 자상하기도

하면서 적당히 뭐라 그런시는 폼이 포스가 있었다.

산만 열심히 다니시는 줄 알았는 데 일하는 모습은 더욱

멋이 느껴졌다.

누님은 약은 꼭 제시간에 육개월은 꾸준히 복용하면 별

탈없이 지나는 데 처음에 제대로 복용하지않으면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 치유가 힘들어 질수있다고 했다.

그래서 집에는 알리지않고 인수봉에서 이주, 선인봉에

가서 이주, 설악산도 가고

어쩌면 싱글의 마지막 시간중 내 그동안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나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보며 시간을 보냈다.

매트리스도 아예 에어매트리스를 쓰지않고 건축자재용

스치로폴 단열재를 세토막내어 테이프로 연결해서

운반해서 텐트 밑에 깔았다.

장시간 텐트 생활에 그 이상 좋은 깔개는 없었다.

그리고 영양 공급을 위해 솥을 걸어놓고 사골을 고아먹고

주위 산악인들에게 나눠도 먹으니 인기도 좋았다.

마침 그 때 일주일간은 오환씨등 입상자 세명과 한국에서

처음으로 오점십이급 인수봉 코끼리 크랙을 등반한

김 동철까지 일본 조가사끼 암장으로 원정을 갔는데

가기전 인수봉에서 훈련하고 있어 같이 등반할수있는

기회가 되어 금상첨화였다.

그 해 일등은 산당 산악회 출신이었는 데 토탈 클라이머로

유명한 헤라클레스 정 승권씨도 그 산악회 출신이었다.

그래서 선인봉을 주 무대로 하는 산당산악회원과 등반도

하고 나처럼 홀로 있는 산악인들도 심심찮게 있어

등반도 하고 달 뜨는 밤에 막걸리 한잔 하며 하는 산얘기도

좋았다.

그 때 누군가가 선인봉에서 나체로 달 밤에 등반하는

기분이 땡이라 그래서 한 번 같이 시도해 볼까도 했는데

체면이 앞을 막았다.

선인봉에는 포항의 내연암 처럼 직벽도 많고 해서 더욱

친밀감도 느끼고 침니코스도 있고, 까리한 슬랩과

크랙이 조화를 이루어 참 재미가 느껴졌다.

이런 다양한 곳에서 훈련하는 그것도 삼백육십오일에

가까운 풀타임 클라이머도 많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정도 되서 시작하니 이십대에는 날라

다녔다.

동작도 부드럽고 순발력과 리듬에서 차이가 남을 인정해야 했다.

나도 그렇게 암벽에 미쳐 가다 한번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아볼까 생각도 한 적이 있지만 막상 그렇게 매일 등반만 하는 모습을 보고는 맘이 달라졌다.

그래도 먹고사는 기반이 더욱 중요함을 병가로 휴직을

해 보니 회사 좋은것이 느껴졌다.

외국의 특히 산악인은 대개 선진국 사람이었다.

흑인 등반가도 당시는 거의 볼수는 없었다.

다들 그렇게 유명해도 생활은 어려웠다.

일종의 전위 예술가로 느껴졌다.

그 때 인수봉에서 당시에 일본의 세계적 클라이머 와따나베씨를 만났는 데 악수하는데 악력이 장난아니었다.

장난스럽게 씩 웃는 데 앞니가 두 개 부러져있었다.

나주에 물어보니 이빨해넣을 돈이 없다고 했다.

빌딩유리창 닦아 번 돈으로 히말리야가고 갔다오면

빈털털이이고 같이 있는 여자 친구까지 자유로운 영혼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두달로 예정된 병가 휴가중 보름 앞당겨 의무실에

가서 검진을 받으니 아주 많이 좋아지고 별 이상이 없다며

복직을 허락했다.

이상은 높아도 발은 땅에 붙어야 맘이 편했다.

그래도 동안 몸을 챙긴 탓에 체력과 체격도 많이 좋아지고

등반 기량도 많이 향상되었고 몸을 꼭 챙기는 버릇이

몸에 배여 지금도 관리를 잘하고있는 것같다.

그리고 프리클라이밍을 한답시고 옷부터 바뀌어갔다.

클래식한 풍덩한 바지에서 몸에 달라붙는 타이즈와

팔은 노출하고 필 꽂히면 외국 등반가처럼 웃통도 벗고.

뭐 못하는게 뭐부터 흉내낸다고.

그때는 외국잡지에 보는 타이즈며 옷이 없어 여자들

에어로빅타이즈사고 동매문에 가서 여자들 티를 사서

개조해서 입었다.

그 방면은 오환씨가 능숙해서 개조해서 선물로 주면

나는 쭈빗거리며 입어 보았다.

그리고 오환씨는 암벽 세계일주를 계획하고 일 년 가까이

코오롱과 와일드 스포츠등의 기업체에서 스폰스를 받아

전세계의 암벽 순례를 끝낸뒤 인공암벽 설치전문가로

등반가로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