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구백팔십육년도에 포항제철에 입사후 연수원 교육을
받고는 입사 동기들과 함께 포항근교 내연산에 어느
토요일 갔다.
그 전에 높고 깊은 산을 본 적이 없어 깊어 보이는 계곡과
산 입구의 가파른 산세를 보고는 신비로움을 느꼈다.
그 날은 산 입구 보경사를 조금 지나서 계곡 옆에서
슈퍼에서 산 나포레옹 코냑과 과자 몇개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연수원 교육을 끝내고 설계실에 배치 받아 친구
상철이 집에 놀러 갔는 데 예사롭지 않는 사진들이 있었다.
암벽등반과 빙벽 등반을 하는 사진이었는 데 중력을
거부한 듯한 폼에 매료가 되었다.
그리고 그 때 몇 권의 책을 빌려서 읽다가 산이 주는
철학과 생각, 외로움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 때 읽었던 책 중에 일본의 자그마한 키에 아이누 족
출신 등반가이자 모험가 나오미가 있었다.
나오미는 당시 오대륙에 있는 높은산 그리고 아마존 강을
혼자서 탐험하고 북극도 횡단한 그리고 어느 산에서
실종을 했는 데 그 사람의 수줍은 듯하면서도 용기가
느껴지는 기록들을 읽으며 호기심이 많이 갔다.
그리고 팔십이년도에 히말리야에 위치한 사람 잡아먹는다는 별명이 붙는 바인타브락 투봉을 세계최초로 등반한 임 덕용씨의 등반기도 아주 빨려 들었다.
그 때 임 덕용씨 자일 파트너가 유 한규씨로 얼마전
남극 다큐멘타리 보다 보니 그 분 얼굴이 스쳐 지나
나중에 프로그램끝날때 자막을 보니 안전요원 유 한규씨의 이름이 보여 여전히 활동하는 모습에 기뻤다.
당 대의 탑 클라이머였다.
그리고 십구세기의 프랑스 클라이머 쟝의 등반에 대한
기록과 철학에 대한 조그만 책이 결정적으로 맘을 흔들었다.
쟝은 당시 알프스 부근의 높은 봉우리에 본인의 기록을
많이 남겼는 데 스물세살나이에 등반하다가 죽었다.
그런데 쟝의 글 중에 이 시간 뒤에 백년이 지나면 모든 사람은 죽고 침대에서 시간을 기다리며 죽던지
산에서 현재를 느끼며 죽는다는 차일뿐이라는 글 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왜 사는지 성경책도 구약은 두 번 신약은 다섯 번씩
읽고 군대 휴가나가서 순복음 교회가 운영하는 기도원에
가서 삼일간 금식기도도 하고 제대해서 서울에서 직장생활 할때는 주일학교 선생도 하고 포항에 내려와
교회도 가고 내비게이토 선교원에서 설계실 선배님
김회용씨로 부터 제자육성 프로그램도 수행중이었는 데
친구 상철이의 조그만 하숙방에서 본 사진 몇 장과 책
몇 권이 인생을 바꿔놓았다.
상철이는 유연성과 발란스 감각이 뛰어나 등반을 아주 잘
했는 데 일찍 철이 들어 은퇴하고 회사다니며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나중에 회사가 지원하는 창원기능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지금도 포항제철에 한 몫하고 있다.
상철이 소개로 고룡 산악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시커먼 수직의 암벽을 처음 본 순간 너무 충격적이어서
악 소리도 안나왔다.
처음 등반 한 코스가 내연산 연산폭포에 위치한 부엉이
코스였는 데 코스를 끝내고 너무나 힘을 많이 써서
목이 말라 폭포에 흘러가는 물 속에 머리를 박고 마시다
보니 위에서 누군가가 오줌을 싸는 모습도 보였는 데
다시 또 박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당시 고룡산악회에서 히말리야 낭가파르밧 옆의
작은 봉우리 라키오트 피크 등반대를 결성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조인이 되고 나는 식량 파트와 기록을
맡아 원정시 두달간의 식단과 비상식 알파미등과 영양학에 대한 서적도 보곤 했다.
당시 포항에는 전문 등반으로는 향로산악회가 대세이고
새로 결성된 막대한 지원이 보장된 포항제철안의
포철산악회가 있었고 내가 소속된 고룡산악회,
그리고 안강에서 오는 무릉산악회도 있었다.
그 때 묘하게 우리 산악회는 회원들의 생업사정과 사고로 선배님들이 뜨문
뜨문 보여 부득이 향로 산악회멤버와 자일도 묶고 특히 내 또래
친한 친구가 주축이 된 포철 산악회멤버와 자리를 같이 많이 했다.
그 때 포철 산악회원 최 철명이 태백산맥을 종주하느라
자료도 수집하고 열성이었다.
철명이는 나랑 동갑이었는 데 아주 스포츠맨처럼 생겼고
운동도 잘했다.
그래서 철명이는 같이 포철산악회에서 활동하자며 권유를
했지만 나는 혼자 외톨이 같아도 의리상 고룡산악회를
떠날 수는 없었고 대신 개인적으로는 아주 친하고
또 신입회원이라도 오면 아주 잘 대해주어 사이가 좋았다.
그친구들이 나중에 파타고니아의 어려운 벽등반 트랑코
타워에 도전해서 나중에 완등은 못했지만 잠재적 능력을
보았고 나중에 회사의 지원으로 해외원정을 많이
갔었다.
나중에 철명이덕분에 스쿠버 다이빙팀 파도라고 품질관리부가 주로 된 스쿠버 팀에서 같이 활동하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나 또한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그 때 그러다가 우리 산악회에서 나 보다 다섯살 많은 포철 선배 이기도 한 남규형이
시간이 되어 같이 자일도 묶고 가끔식 산행도 했다.
남규형은 학교 다닐 때 펜싱 선수를 했다는 데 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과 의외의 소탈한 모습, 문턱없는 공유의식으로 짧은 시간에 깊이 친해졌다.
남규형은 등반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고 나도 관련 전문
서적을 많이 보기를 권유해서 덩달아 해외 서적까지
범위를 넓혀 공부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너무 기술위주의 암벽등반에 치중하다보면 시야가
좁아지기 쉬어 일반 산행도 종종 하며 산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야한다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포항제철은 당시의 회사 정책이 노동의 질도 높이고 삶의 질을 추구하는
방향이어서 일할때 열심히 하고 여가 선용을 잘 해주기를 바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산악활동을 할 수있었다.
참 여러가지 면에서 앞서 갔던 좋은 회사였다.
그리고 나또한 입사전에 야간으로 대학을 다니며 주간에 설계에
대한 실무 경험이 많았고 포철 입사전에 다니던 중소기업체 근무시
납품도 많이 하면서 여러가지 도면이며 시험 성적서와 견적서 까지 경험을 했던 일이라 업무 적응에
큰 어려움이 없어 더욱 깊이 등반의 세계에 빠져들어갔다.
등반은 따지고 보면 필요한 것이 많았다.
일단 체력이 필요해서 트레이닝이 필요했고 해외나갈려면
외국어가 필수여서 영어도 공부하고 간단한 네팔어도
공부했다.
기록을 하기위해 사진도 찍고 종종 산행 보고서도 작성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등반을 통해 많이 했다.
그래서 산에 산악회 들어간 후 일년 이상을 술은 입에만 예의상 적시고 소주 반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다.
아예 산이 신앙이 되어 버렸다.
주말에 등반하기위해 주중은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새벽 다섯시면 일어나 운동하고 외국어 공부등 아홉시
출근전에 끝내고 하루 서서 일할때도 발끝의 힘을
기르기위해 될수있으면 발끝으로만 걸어 다녔다.
다섯시 퇴근하면 운동부터 시작하고 산악 서적을 탐독하고
아홉시 정도에는 원정팀과 토의도 하고 히말리야에
우리가 가고자 하는 큰산의 그림과 지도도 분석하는 등
엄청 바쁘고 긴장된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아갔다.
그래서 추석에도 나는 너무 늦게 시작한터라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아 혼자 설악산에 가서 공룡능선과 서북능선을
주파하고 왔다.
그 때 새벽에 강릉에 기차가 도착했을때 혼자 배낭을
짊어지고 있는 나를 보고 여객전무 아저씨는 아니!
아저씨는 고향도 없냐면서 나무랬다.
나는 산에 빠지고 있었고 산에 미쳐 있었다.
그 산속에서 묘한 외로움을 움켜 잡고는 내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는 카타르시스를 즐기고 있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