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훈이 아버님은 서울대 치의대를 나오신 치과의사였는데
육십구년도에 이민을 오셨다.
당시에는 이민을 오기가 힘든때인데 어쨋든 여기와서는
의대를 다시 다녀야하기 때문에 컨비니언스 가게를 하셨다.
당시만 해도 가게를 하면 돈을 많이 벌어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부유한 그런 시절을 보내신 것 같다.
기훈이는 누나와 형님이 계신데 다들 그 때 같이 오셔서
자리잡고 잘 사신다.
다들 지역 사회에 봉사도 많이 하시고 누님은 우리 애들
어렸을 적에 성당에 가면 사탕을 나눠 주곤 별명이
산타 맘이었다.
기훈이 형님 기돈이형도 사람 좋기로 하염없이 좋은
호인으로 한글 학교 교장을 하기도 하고 이민온 청소년들
에게 참 많이 봉사와 지도를 아끼지 않았는 데
안타깝게도 작년에 심장마비로 돌아 가셨다.
기훈이네는 남달리 화목하고 남들 위해 봉사를 많이
했는 데 참 마음이 아팠다.
기훈이는 여기서 국민학교 부터 다녀 거의 캐너디언으로
자라서인지 여기 이민온 애들을 참 잘 돌본다.
청소년 프로그램이 있으면 지도도 많이 하고 여름에
캠핑등 활동이 있으면 잘 이끌어간다.
애들을 이끌려면 여기 자라나야 애들의 정서도 이해하고
정보도 공유하고 말도 통하면서 리더싶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훈이가 적격이었다.
기훈이는 고등학교 때 미식축구부 주장을 하고 레스링으로 온타리오 주에서 은메달도 따는 등 한국사람으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스포츠맨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그 학교 벽에 그 해의 아스레틱으로 동판이
붙어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아무리 운동을 잘해도 성적이 일정하게 되어야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있다.
학교에서 캐너디언들이 기훈이 보고 참 특별하다고 했단다.
보통 코리안은 공부만 잘하고 운동은 못하는 데 반대라면서.
나중에 운동부에 들어온 두세살 적은 같은 학년의 한국
출신 천재가 있었는 데 운동이랑 거리가 먼 데도
너무 운동을 하고 싶어 끼워 줘서 물 심부름도 시키곤
했는 데 그 친구는 일생의 큰 기회로 알았는 지 너무
신나게 활동을 했다 한다.
아마 이 상무 씨만화의 키 작은 독고탁이 연상되었는데
나중에 그 친구는 졸업하면서 기훈이 한테 너무 고마워
했고 또 기훈이 고 삼때 맘잡고 공부 할때 도와줘서
평균 성적이 팔십 점이 넘었다.
그 덕분에 맥매스터 대학을 장학금 받고 학교를 다녔다.
여기는 한국과 달리 공부를 잘한다고 꼭 장학금을 주는 것
은 아니고 여러가지 케이스가 있어 나름대로 리스취를
해야 찾아먹는 것이 다른 것 같다.
기훈이 같은 경우가 어느 독지가가 도네이션을 하며
이 장학금은 레스링에서 수상 실적이 있는 사람이
성적이 평균 팔십 점이 넘는 사람에게 수여한다는 조항이
있었단다.
그 독고 탁 같은 한국 출신의 꼬마 친구는 미국의 엠아티
공대를 들어가서 졸업후 남아프리카 공확국의 정부 청사의 컴퓨터 시스템을 설치한다고 하면서 기훈이 한테
연락이 왔다고 들었다.
참 보이지 않게 여러 분야에서 한국사람들이 세계를 무대로 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훈이하고는 서로 캠핑도 좋아하고 운동도 같이 즐겨서
참 편한 느낌이 든다.
언젠가 둘이서 알공퀸 파크에가서 커누를 타고 캠핑을 하자고 했는 데 언젠가 할 조그만
꿈이다.
알공퀸파크는 온타리오에서 제일 큰 주립 공원으로 넓이만 한국의 경상북도만큼 넓다고 들었는 데
개발되지않은 원시림과 호수로 채워져 있는 자연 상태의
공원이다.
커누를 타고 호수를 가다 육지가 나오면 다시 지도를
보면서 커누를 메고 다음 호수로 연결되고 때로는 작은
섬에서 야영을 한다.
화장실도 대개는 없는 곳이 많아 숲에서 해결하면 모기도
달려들고 전기도 없고 도끼 한자루로 나무를 해서 모닥불을 피운는 문명의 흔적이 사라진 곳을 찾는 커누 여행을 둘이서 하자고 약속을 했었다.
언제가 십년 전에 알공퀸 파크에 야영하면서 다른 사람은 텐트에 자고 혼자 비박을 하는 데 칡흑같은 밤에 안개 틈새로 늑대의 숨소리가 새어 나와 아! 여기는 한국과는
틀리구나 싶어 얼른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그런 원시의 척박한 자연을 이해하는 몇 안되는
사람인지라 서로 잘 통하고 함께 하면 즐거운 것 같다.
요즈음은 이민자가 많이 들어오고 해서 인구증가와 함께
분위기가 바뀌어 가지만 기훈이 학교 다닐때만 해도
캠핑가면 어떤 캠핑장의 나무구멍에 다음에 야영하는
사람을 위해 양주도 넣어놓고 포도주도 놔두고 조그만
물품도 편지와 함께 두곤 했다고 한다.
캐나다의 호랑이 담배 피는 시절 얘기이다.
그런데 여기 캠핑장은 백 년이상 된 곳도 많고 대개는
알브이 차량 있는 사람들과 같이 사용하는 데 빈부 차이를
별로 느낄 수는 없다.
요즘 한국에도 캠핑이 붐을 이루고 캠핑 용품도 명품도
있고 비싸다는 데 캐나다는 자기 식대로 편안하게 남 눈치
안 보고 편안하게 즐기는 분위기가 여기 캠핑 같다.
기훈이 학교 다닐때 형 따라 자전거로 캠핑장비를 싣고 피터보로까지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고 들었다.
그 당시에는 여기에도 군용 에이형 텐트였던 것 같다.
어느날 언덕위에서 도로를 따라 먼저 내려가던 친구들이
내리막 다 내려가서는 자전거가 비틀대고 멀리서 보니
아스팔트 도로에 아지랭이 처럼 뭔가 흔들리는 듯 보였다고 했다.
정작 본인도 자전거를 타고 내려 가서는 기겁을 하고
자전거 핸들을 놓칠 뻔 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피터보로 쪽에는 차량 통행이
적었는 지 아스팔트 따뜻한 곳에 뱀 떼가 일광욕을 즐기는
것을 차가 지나갔는 지 동강나있는 뱀이 죽지 않고
비틀대서 멀리서 보면 아지랭이 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얘기 들으며 참 많이 웃었고 캐나다의 자연이 어떤 것이 짐작이 가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연미 넘치게 자란 기훈이여서
인간미가 넘치고 우리 친구들 이민와서 기훈이와 또한
정많은 기훈이 와이프한테 도움 받지 않은 친구들이
없을 것 같다.
그래 기훈이는 복 받을끼야.!
기훈이 얘기하면 끝이 없이 나오는 데 대충 사십 년전에
이민와서 살아간 기훈의 스냅사진 몇 커트만 찍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