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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박진양 2012. 7. 3. 13:51

 

한 창 일 하는 재미에 빠 져 있은 때 해도 바뀌고 캐나다의 긴 겨울 마저 접어 넣고

 싱그런 오월 레스토랑의 명성도 나날히 높아지고 일 손도 바빠졌다.

나에게 많은 요리의 영감을 주던 이태리의 한식요리사도 캐나다 의 영주권 여의치않아

 캐나다를떠나고 주방에 사장님 처남이 보강되었다. 

당시 스물을 갖 넘었서도 속이 깊고 명랑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캐나다에 잘 어울려 보였다.

지금은 결혼도 하고 레스토랑도 오픈해대 성공을 했는데 그런 걸 보면 한국사람 많이 이민와야 겠다는 생각이든다.

벌써 한국의 일 식당에서 이 삼년 경험도있어 솜씨가 있었는 데 허드렛 일을 시켜도 내색 않고 밝게 잘 해나갔다.

한 달 동안 휴일 없이 일을 시켜도 씩씩하게 해 나갔다.

디시와셔 부터 했는데 아무일이나 이것 저것 맡겨두면 무슨 일이나 시원 스럽게 처리를 잘 했다.

술은 많이 안마셔도 흥이 넘쳐 퇴근후 술 자리도 같이 하고 운동도 같이 해 금방 친해 졌다.

식당의 제반 사항을 상세히 인계 했는 데 몇 달 지나자 다 소화 해서 일 하기가 너 무 편해쪘다.

동안 주방 식구들을 이끌어 오다 시피 해서 몸은 힘 들어도 내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서인지 맘은 편했는 데

어느 정도 궤도 에 오르고 몸은 편 해지니깐 존재감의 상실이 조금 느끼고 돈 값은 하는 지 하는 생각이 든 것 같다.

사장님 께서 변함없이 잘 해주셧지만 이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떠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삼촌 실력이면 충분히 잘 해나갈것 같았다.

그 즈음 해서 전설의 샘 아저씨한테 연락이 왔다.

첨 한 식당에 일 할때 스시바 쉐프 일 주일 휴가 갈 동안 대신 근무 할때 만 났다.

당시 주방장 하루 쉬는 날이면 스시바 쉐프가 팔보채등 웍 요리를 돠와 주곤 했는 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몇 달 가지고 중국 요리는 쉽지 않았다.

미리 인계 받은 것도 남의 주방을 그 것도 스시바 쉐프가 자기 주방 처럼 척척 하는 모습이 감동이었다.

같이 근무했던 베테랑 찬모 할머님도 입이 마르도록 칭찬 하시면서 수준이 다른 사람이라고.

식당에는 열사란이 있어도 못 할일을 한사람이 해결하는 사람이 있는 데 그런 요리사 가 샘 아저씨리고 하면서

나도 일식을 배워 보라고 권 했다.

그후에 그 식당이 나중에 기회가되면 얘기하겠지만 사정상 관두게 되었을때 샘 아저씨가 근무하던 식당에 가게

되었다.

적은 주급에도 게의치 않고 열심히 했지만 한달이 안되 쫓겨나게 되었다.

그 얼마뒤에 쫓아낸 사장님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와서 다시 일해달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그렿게 쉽게 자리를 옮길수도 옮 길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섭섭 했던 감정은 정리하고 싶어 인사드리러 같더니 반갑게 맞이 해주셨다.

소주 한잔 걸치고 맘 정리하고 나니 추억으로 남았다.

알고 보면 본심이 다 그런 것은 아닌데 상황과 일이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같다.

그 뒤에도 종종 뵙고 샘아저씨하고도  친하게 지냈다.

나이도 나보다 좀 많았고 경력이 이십년이 넘는 베테랑 쉐프로 헬퍼의 세계에선 전설 그자체였다.

일단 근무한 식당마다 대박을 터뜨렸고 스시바 주방등 모든 부문에서 일을 시원하게 처리를 잘 했고 늘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대인 관계의 폭도넓었다.늘 같이 있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때도 끊임없이 전화도 오고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물론 식당에 관계된일로.

그럴 즈음 샘아저씨로 부터 식당을 같이 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식당에 첨 일하때 식당을 운영할 맘도 계획도 없었다.

그전에 다른 쟙들을 가졌지만 생활이 될 정도로 주급도안되고 잘래성이 없어서 기술을 배우면 나중에 

단순한 캐쉬어 쟙보다 낮지않을까하는 맘이었다.

그런 비젼과 시야가 없어 첨엔 한쪽귀로 듣고 흘려 보냈는데 그러면서도 같이 뭘 할려는 다른 사람보다는 

나을 것도 같고 웬지 지금의 너무나 따뜻한 보금자리를 웬지 떠나야 할 겄같던 느낌으로 

그리고 반은 재미삼아 샘아저씨를 따라 퇴근후 밤 열두시가 지나서 식당자리를 알아보기 시작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