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는 이민으로 형성된 나라이다.
그중에 동양 계통은 최근 금세기 그것도 육십녀대 정도되어서
문호가 개방되었다.
록키산맥을 넘어서 뱅쿠버까지 대륙횡단 철도를 부설할
십구세기말에 중국사람 노무자들이 와서 특히 록키산맥
구간에 그 분들의 희생이 많았고 그 중국사람들이 동양
계통의 원조가 되었고 그러다 천구백삼십년대부터는
호주와 미찬가지로 백호주의라는 것이 있어서 동양 사람은 이민문호가 닫혀 있다가 경제적 필요와 시대적
흐름에 의해서 육십년대 부터 동양사람에게도 문호가
열렸다는 것 같다.
영국계통 사람들이 고상하고 지성적으로 보여도 속으로는
은근한 차별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요즘은 여기에 와 계신 이민오신 한국 카뮤너티의 인구가
토론토에만 십만이 넘는 것같다.
여기에 각종 한인 단체가 있고 여러 많은 분들이 봉사를
하고 있다.
그중에 약간의 정치성을 살짝 추구도 하고 경제적 필요로
인한 실협 협회같은 단체도 있는 데 가끔 신문에 나와있는
단체에 거의 회원의 반에 달할수도 있는 만큼 이사들 이름이 많은 것에 조금은 의아했다.
직위에 조금 연연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사실 회장이면 어떻고 회원이면 또 어떨까?
전체의 목적을 위해 서로 합심해 노력해서 성과를
만들어 내고 그 과정에 함께 하는 맘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떤 분들은 한인들의 봉사 단체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체에 뭔가 비중을 두시는 지 본인이 거물이라고 소개하시는 모습도 본 것 같다.
그래서 인지 단체에 젊은 분들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살아가느라고 바빠서 그럴 시간도 부족해서이겠지만.
하지만 대다수 많은 이민오신 선배님들이 조용히 당신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후배들이나 한인 사회에 역활을
하시는 분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나랑 아침 저녁으로 자주 와엠시 헬스클럽에서 뵙는 구상회 박사님도 그러신 분중의 중요한 한분일 것 같다.
박사님은 연세가 팔십 둘이신데 토론토의대를 나와
뼈 분야의 전문인으로 연구를 하고 강의를 하시다
정년퇴직을 하셨다.
한 십년 전 한국일보에서 하는 중국어 강의를 일년간
들었을때 옆 짝궁이었다.
지금도 정확히 잘 모르지만 그 때도 그 분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런데 공부 할때 옆에서 보면 노트 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참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모습에 연세 있어 보이는 분에도 불구하고 집중력도 있고 딱딱 정리해가는
또 교과서의 문구밑에도 주해서를 나름대로 너무 정리를
잘하셔서 중간 중간에 힐끔거리고 봤었다.
그리고 회식하는 자레에서 뵈면 어떤 권위의 벽도 없이
십대의 순수한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맑은 눈동자로
친절하게 얘기를 해 주셨다.
나중에 보니 신문에 의학 상식에 대한 칼럼도 간간히
쓰주시고 나이드신 분이나 갱년기 여성분들을 위한
골다고증 같은 분야의 세미나도 해주시곤 했다.
그런데 늘 개인적으로 뵈면 항상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시거나 먼저 보면 먼저 해주신다.
그렇게 밝고 맑게 살아가셔선인지 와엠시 헬쓰클럽에서
보면 아직도 군살도 없고 청년 같은 몸매를 유지하고 계신다.
박사님은 천구백오십육년도에 미국에 와서 신장 분야의
의ㅏ학을 육년간 공부하셨다.
그 당시에 미국을 갈때는 직접가는 것이 없어 배를 타고 대만을 거쳐 두 달만에 미국에 도착했다고 하셨다.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후 지인의 소개로 토론토의대에서
뼈 분야에서 공부하면서 연구원 생활을 하셨다.
그 때가 천구백육십이년도이니깐 육십이년도에 이민을 오신 셈이다.
육이오 전쟁중에 공부를 해서 미국에서 공부할 때
기초가 약함을 느껴 좀 더 공부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박사님은 지금도 여전히 호기심도 많으시고
새로운 여러 분야에 공부하는 것을 취미로 갖고 계신듯
하다.
그중에 중국어 공부도 그런 맥락이서인 것같다.
참 그런 순수한 열정이 부럽다.
그런데 가끔 사적으로 만나면 옛날 얘기도 많이 해주신다.
옛날 육 칠십년대 초반에는 토론토에 한국 식품점이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그때는 교민분들이 거의 없었으니깐.
한번은 신혼 무렾 정도 되어 사모님께서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는 데 병원에서 병명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당시에는 배추가 없어 중국식품점에
서 배추 비슷한 박쵸이 종류를 사다가 소금 좀 뿌리고
어렵게 고추가루를 구해서 뿌려 김치 비슷한 샐러드를
만들어 사모님께 먹여 드렸는 데 그날로 병이 나아
퇴근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미국 출장갔다오면서 김치와 고추장을
비행기에 가지고 오다 낮은 기압으로 터져 나와 너무
당황스러워 새로 산 양복으로 그 것을 다 닦았었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곤 요즘엔 한국식품점 식당이
있어 너무 좋다고 하셨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먹고 사는 데 힘들어서 그렇지 요즘엔
웬만한 것은 한국에 있는 것 다 있고 인터넷 발달로
연락도 잘 할 수있어 세상이 참 좁아진 느낌이다.
박사님은 요즘에도 늘 운동하시고 곤부를 하고 계신다.
엊그제는 같이 만나
골프 얘기하다가 사진을 한번 찍었다.
박사님 흔적 자체가 토론토의 이민사 한 부분이 되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