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나 미국을 여행다녀 보면 경치도 좋고 사회도
안정되어 보여 한 번쯤은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돈이 있으면 무턱대고 와 있어도 여기에 유학원이나
이민알선업체가 있어서 다 알아서 해준다.
또 미국에는 주마다 기준은 틀리지만 기업체에 얼마간
투자를 하면 영주권이 나오고 캐나다의 대서양쪽 등에도
인구를 늘리기위한 방편으로 투자이민 제도가 있다.
보통 사람은 미리 알아보고 계획을 잘 해서 오는 것이
낫다.
다 여기에는 한번 단추를 잘 못끼면 고치는 것이 힘들고
돈도 많이 든다.
사십대 전이라면 아예 여기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지금 캐나다 정부에서도 그런 길로 유도
하는 것 같다.
부부라면 남자 야자 따지지말고 어느 한쪽에서 학교를
다니면 다른 배우자는 생활을 위한 취업비자가 나오기
때문에 잘 이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
그즈음 해서 사촌동생 정훈이가 왔다.
집안도 너넉한 터인데 당시 서른둘정도 나이가 되었는 데
대학졸업할 당시에 아엠에프를 만나 취직이 힘들어
아주 고생한 세대란다.
정훈이 누나도 매형과 함께 자리잡고 있어 일단 불렀는데
포커스를 못잡아 몇달이 흘러갔다.
그런는 동안 우리식당에서 뒷주방일을 했는데
심중이 깊어 주위 사람을 편하게 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착하고 좋은 사람은 일은 빨리 늘지는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다 늘고 한번 데워지면 두꺼운 구들장 처럼
뒷힘이 있어 쉽게 변하지 않는 진정한 일꾼이 되었다.
정훈이도 한국에서 부유해서 일을 해보지않았는데도
군필을 해서인지 철도 들고 은근히 일머리도 있어
몇 달 지나니 식당에서 한 몫을 했다.
여건이 되었다면 식당일을 배워 나중에 식당을 차려도
괜찮을 뻔 했는 데 그러기위해서는 시단이 촉박했다.
식당을 통해 취업비자를 낼려면 한국에서의 자격증도
필요하고 여기에서의 프로세싱이 하는 동안의 시간도
있어야했다.
그래서 나중에 퀴벡쪽도 알아보다 토론토 인근의
정육공장 쪽에서 취업비자를 알아보다 시간이
다 되어 한국을 갔다가 한국에서 기다리다 어찌하다
그냥 한국에 눌러 앉았다.
한국에서 재수씨도 있고 애기도 있고 해서 여러가지가
장애가 되었던 것같다.
사실 정훈이 같은 경우에는 여기에 학교를 다니는 것이
나았고 나도 그것을 권했다.
재수씨가 다니던 정훈이가 다니던 간에 부부 한 쪽에서
영어가 되어야 장기적으로 보면 캐나다에서 살아 가는
데도 편하고 공부하다보면 이 아라의 네트워크를 구축
해나가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즉 여기서 자리 잡고 살기 위한 취직과 영주권 내기가
쉽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칼리지 이 삼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고
다른 배우자에게 취업비자가 나와 신분적으로도 안정이
되는 잇 점이 있다.
정훈이 같은 경우에는 여기에서 살아도 딱 성공할 스타일
인데 물론 여기 와서 생활이 도움이 됐는 지 헌국에서도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있는 동안 형으로서 제대로 뭐 길을 열어 주지 못해
안타까운 내 입장이라 좀 그렇다.
그리고 그때 정훈이 어머님 즉 나한테는 작은 어머님 이시고 어릴적 너무 잘해주셔서 보답을 해드렸어야 했는데 그즈음에는 스시바의 주방장이 따로 없어 내가 시간을 빼기가 어려워 식사 대접도
제대로 못해드려 참 아쉬웠다.
그리고 작은 어머님께서도 외국 생활하는 조카에게
민폐가 된다면서 외츨하시길를 꺼려하셨다.
어떻게 기화를 기다리다 차일 피일 하는 사이 다 떠나가셔
참 아쉬운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