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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사스후 부활

박진양 2012. 9. 16. 06:05

지금 시대에 이 정도이면 중세기때 페스트가 유행할때는

어떠했었나 싶었다.

그 때는 정말 전 유럽의 인구가 삼분의 일로 줄었다는데

지금은 일년 동안 몇 십명의 사스로인한 사망 소식은

매일 나는 교통사고에 비해도 아무 것도 아닐정도

인데.

그것도 직접적인 원인이 사스인지 나중에 보니깐 규명

하기도 어려운 점도 있었다.

어쨋든 일년 가까이 지난면서 사스도 흐지 부지하는

분위기가 될 때쯤 플라쟈에서 동안의 얼었던 발걸음을

녹일려고 특별 이벤트를 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몰이나 플라쟈에서 비즈니스하는 것이 잇점이 있었다.

관리비를 받는 만큼 결정적일때 새입자가

살아야 몰이 사는 만큼 규모의 경제가 되는

만큼 행사등을 해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사스사태가 한창일때는 렌트비를 반으로 해주었다.

물론 그 행사가 있었던 후로 부터 몇달 뒤에는

분할해서 갚으라고 통지가 왔었다.

웬만하면 캐나다에서 몰이 렌트비 미뤄 주는 경우는 없는데 그만큼 그 당시가 심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미리 두달 전부터 광고를 했고 중국커뮤너티에서

활동중인 가수도 부르고 선물권도 추첨하고 야시장도

열고 해서 대대적 판촉행사를 했었다.

그래서 그 플라쟈의 각 식당에서 저렴한 가격대의 스페샬

아이템을 선정해서 식당앞에서 따로 판매할 수있도록

했다.

우리식당에선는 캘리포니아 롤과 크랩 샐러드 롤, 두가지를 선정해서 각각 이불에 팔았다.

그때 우리식당에서 제일 예쁘고 야무진 선민씨에게

맡겼다.

선민씨는 얘기는 안할려다 이제야하지만 조지브라운대학의 호텔 경영학과를 다니며 일을 했었는 데 정말 빼어난미모와 몸매, 빈짝이는 눈으로 웃음을 지어면 웬만한 사람은 다 넘어 갔다.

우리 식당에서 삼 년 넘게 홀을 커버한 메니저였다.

식당의 살림을 알아서 다 할 정도로 비즈니스 감각도

있고 당찼다.

그 뒤에 얘기하면 다 아는 한국 연예인의 며느리가 되어

뱅쿠버에 살고 있는 데 작년인가 아기를 데리고 식구들이랑 인사차 들렀는 데 더 예뻐 지고 행복해 보여

참 보기가 좋았다.

그 때 밖에서 파는 김밥은 뒷 주방에서 따로 두 직원이

만들어서 팔았는 데 하루 종일 줄이 항상 백명 가까이

유지 되었던 것 같다.

그 날 뜨거운 여름 간이 돈통을 들고 혼자서 하루종일 서서 줄 정렬시키고 새치기하면 잡아내면서 저녁 열시 까지 판매를 했던 선민씨도 대단했었다.

평소에 가끔식 화요일날이면 피자집에서 스페셜을

할 때면 몇십명이 줄을 설때면 우리 손님 없는날 부러워 쳐다 보았는 데

그날은 플라쟈에서 우리 식당의 날이 되었다.

대형 슈퍼의 입구를 줄 서느라고 막아서 중간에 줄방향을

군대 사열 하듯 당찬 선민씨가 바꿔 주었다.

한번에 두롤 밖에 팔지 않다보니 어떤 단골 꼬마 손님은

하루 종일 줄을 다섯번씩이나 서서 먹었다고 자랑을 했다.

자기 딴에는 큰 돈 아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참 조금 싼 그것이 뭐라고 하루종일 줄을 서는 줄은

나는 이해가 안되었다.

그날 밖에서만 이천불을 팔았던 것 같다.

그 날은 식당안에서도 바빴다.

홀 안과 투고 손님은 평소와같은 가격으로 팔아도 손님이

무지 많아서 나중에 저녁 열시가 되니깐 모두 지쳐서

그 뒤에 오는 손님은 밥 떨어졌다고 팔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렇게 화려한 컴백 행사가 있고난 다음 부터는

자동차 시동을 걸고 나서 달리듯 비즈니스도 그 전처럼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