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이 나가고 맘내려 놓았다 했지만 식당에는 많은 사람
들이 몸 담았다가 지나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탄력을 받아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되어 나름대로의 둥지를 트는데 지푸라기가 되었다.
뒷주방 영감 부루스도 날개를 펴서 중국으로 날라갔다.
그 뒤를 창훈씨가 메꾸었다
키가 자그마니 딱 식당 체질이었다.
까무짭잡하면서 아주 날렵했다.
아예 첨 이었지만 한 이주 지나깐 날라 다녔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영웅이 있는 것 같았다.
한 두달 뒤에 스시바 일도 가르쳤더니 한달 남 짓 지났나?
금방 차고 올라 왔다.
한국에서 자그마한 체격이지만 뭐 좀 했던 것 같다.
그 때 마카오를 거쳐 캐나다에 왔는 가 싶었는 데
처음에 좀 어두운 얼굴이 우리 식당에 오면서 사람이
밝아졌다.
본인도 캐나다에 있고 싶었는 데 한국에 기소된 사건이
있어 가 봐야 된다면서 육개월 남짓 지나서 돌아간것
같다.
한국 가기전에 취미로 컴튜터 게임 골퍼를 좋아해서
실제 골프장에 데리고 가서 머리를 올려 주었다.
그때 나는 벌써 보기 플레이어는 되어서 차근히 잘 가르쳐
주었다.
골프장아니 골프채도 아예 첨 잡아 잔뜩 긴장해서 실제는
게임과 너무 틀리다면서도 제법 잘 따라와주었다.
그때 같이 동반 플레이를 했던 캐나디언 할아버지가
자기는 오십년 간 땅만 파고 있는 데 처음 부터 너무
잘한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일이 오래 걸리는 지 아직까지 캐나다에 안오고 있다.
그 바톤을 파이럿 미스터 최가 이어 받았다.
미스터 최는 토론토에 있는 비행학교에 다녔다.
대서양쪽 도시 헬리팩스에 어학연수 갔는지
그 곳 캐너디언 독지가의 도움을 얻어 비행학교를
다녔다.
어느 좋은 독지가인지 차까지 폴스바겐이면 싼 차도
아닌데 지원을 해주었다고 했다.
삼 사년 다녀 졸업은 했지만 취직을 위해서는 일정
비행 시간이 필요해서 계속 연수 비슷한 비행 연습을
하고 있었다.
생활비라도 벌려고 우리 식당의 디쉬와셔를 했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성과는 조금 약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해서인지 정말 열심히 꾸준히 했다.
일년 넘어서 까지 꾸준히 뒷주방을 지켜 주었다.
그리고 일을 떠나서 꿈나무 제이의 맘도 지켜 주었다.
제이도 일 서툰 형을 도와 좋은 분위기에서 이어 갔다.
하나 하나는 일이지만 둘이 있어 삼을 창출한 관계였다.
식당을 운영하며 직원을 대할 때 아예 일로서 밀어 부치는
경우와 사람의 특성을 살펴 입장에 맞추는 경우가 있다.
대개 한국에서의 요리사 출신은 박력있게 전자의 경우
이지만 좋은 경우도 있고 때에 따라 사람을 못 만나면
고생하는 것같다.
후자를 택하면 캐나다에서는 조금 더 오래 좋은 시간을
가질수도 있는 데 그럴러면 끝없는 자기 성찰과
인내심과 이해심과 적당한 선에서 끊을 수있는 지혜가
필요 한 것 같다.
어느날 식당이 조금 한가한 시간이라 판단했는지
미스터 최가 제이를 데리고 나가 인생 공부를 시키는지
강의를 하는지 그러는 동안 오다가 들어 왔다.
그 때 그 순간에 뭐가 갑자기 올라와서 달려가 호통을
친 것 같다.
미스터 최가 제이 앞에서 그러는 것이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 같았다.
사실 어쩌면 공적으로는 갈 만큼 간 것이 아닌가싶다.
사람이 화가 나도 꼭 한 가지 가지고는 금방 나지는 않고
쌓이기 마련이니깐.
그 때 사람이 화가 나도 오너를 전후 입장을 생각해서
자제해야함을 배웠다.
하지만 뒷 일에 대한 개념도 부족한 사람이 긴 시간 동안
헌신을 해 주어서 식당이 운영 될 수있었다.
다음에 미스터 최 만나면 치킨 윙에 맥주 한 잔 사주어야
겠다.
아마 시간이 흘러 반갑게 얘기 할 수있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