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양 2012. 9. 5. 08:56

 

 

 

 

십육만에 오셔서 삼주만 계신다는 데 그 시간이 아쉬어

시차 적응에 힘들어 하는 동생데리고 아침에 골프연습장에 갔다가

저녁에는 재수씨까지 모시고 카페에 가서 못다한 얘기하고

주말에는 캐나다 동부와 뉴욕 관광을 보내는 등 바쁘게

보냈다.

헤진이 엄마도 식당일은 스케줄에서 빼고 집에만 신경쓰느라 더욱 힘들었을것같다.

첨 보는 재수씨와 조카지만 얘기하다 보니 새로 정도

들고 하는 걸 보면 사람은 만나야 봐야 정드는 모양이다.

어머님께서 네 성격에는 이민 잘 왔다.

뭔가 맞지않는 일이 있으면 고함을 지르더라도 풀고

지나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품고만 있어

힘들었을까라는 말씀에 아! 어머님은 날 이해하시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나 삼 주를 같이 지내니깐 별로 변 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어머님 성격때문에 주위 분들이 많이 힘들어 하는 것이

똑같았다.

내가 일곱살에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이혼을 하셨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재혼하시고 어머님은 혼자서

동생들 키우며 열심히 사셨다.

집념과 노력이 있고 워낙 검소하게 생활하셔서

집 건측을 해서 동생들 대학도 보내고 지금은 좀 여유가

있으시다.

나로서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내가 변변하게 자식으로 해드린것도 없어 늘 미안한

맘인데 무릎 수술을 하셧어도 건강한 모습이 고마웠다.

여기와서 보면 내 환경이 별 문제도 없는 데 그때는

참 민감해서 총각 시절 쉽게 결혼 결심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사람 만나는 것도 쌓이고 하면서 결혼은 내가

덕 보는 것보다 누구에게 진심으로 주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는 데 그즈음 유달리 추워 보이는 혜진엄마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그때는 진심이었다.

헤진엄마는 수녀원 가기전에 일년 간 병원에서 간호원일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환경이라 내가 진심으로 보듬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 할때도 어머님께 그런 얘기를 안했는 데

나중에 너무 섭섭해 하셨다.

집념이 있어신 분이라 여러가지면에서 그러셔서

어느날 계속 그러시면 이민 간다는 말이 씨가 되어 정말

오게 되었다.

안그래도 어머님이 두분이라 집 사람이 힘든 부분이

있는 데 우리 애들만은 나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 나을 것 같은 것이 큰 이유가 되었다. 물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지적인 허영심이

있었지만 그것 하나때문에 포항제철을 나올 만큼

용감하지는 못한 사람이다.

그래도 막상 오고 나니 동생들에게만 많은 부담을 준것

같아 미안하고 한국이 늘 그리웠다.

내가 철이 없어 온거라고 생각했는 데 삼주간 생활해보니

올 수밖에 느끼니깐 멘탈이 붕괴됨이 느껴진다.

결정적인 혜진이 엄마의 말, 에제 보니 당신은 엄마랑

똑같다는 말에 확인 사살이 되었다.

엄마랑 다르게 자식들 부담주지않고 대화상대가 될수있도록 노력해는 데.

아마 한번 결정하면 끝가지 추진하고 될때 까지 매달리는

집요한 성격을 말하겠지.

그래 자식이 부모 달은 것 당연하다.

내 운명과 내 삶을 사랑하자.

사랑이 안되어도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인것 같다.

이민와서 살아보니 생존의 법칙아래 나머지 문제는

보시랍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