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시카고에서 온 친구
그 해 여름 시카고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포항제철의 입사 동기생인데 내가 이민오고 몇 해 뒤에 시카고에
있는 누님을 통해 이민을 왔다.
와이프도 산악회 후배라 각별한 사이였다.
매형이 시카고에서 세탁업으로 성공하셨다.
미국은 캐나다와 달리 업종도 다양하고 시장이 커서 이민자가 가도
선택할 수있는 폭이 넒었다. 그래서 그 친구는 포철 다닐때의 전공을
살려 세탁업에 관련된 설비 설치나 수리등을 해서 자리를 잡아 나갔다.
그런데 와이프가 이민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이민오기전에 인터넷을 통해 현지 사람들로 정보도 받고 해서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때 마침 혜진이 엄마가 한국에 잠시 들어 갈때 만나 충고도
했지만 그 경우와 틀리다며 확신에 차 있었는 데 그런 만큼 더욱
실망이 컸던 것 같다.
더 결정적인 것은 아들만 둘이었는데 큰 아들이 학교에서 놀다
팔이 부러졌는데 치료비가 만 이천불이었다.
한국같으면 기브스 하는데 오만원이면 될것이 천 삼백만원이라는 데는 충격이었고
정나미가 뚝 떨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물론 그때 일시불로 주지는 않고 상담해서 이십년 상환으로 해서 당장의
부담은 덜했다.
미국의 경우 의료 제도가 복지의 맹점으로 떠 올라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캐나다는 사회주의 국가처럼 전액 면제라 미국가서 살다가도
이프면 캐나다에 와야한다. 실제로 돈 버는 것이 나아 미국에
살다 아파서 캐나다에 돌아오는 이웃을 봤다.
그래서 맘도 풀어줄겸 일주일 시간을 내어 우리집에 머물며 같이
여행도 하고 얘기도 많이 했다.
밤에는 친구랑 둘이 나와 아파트 정원에서 한참동안 별을 보며
얘기를 하기도 했다.
미국갈때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또 보고 간다고 안부를 전해왔다.
그런데 몇년 뒤에 시카고에 가섰을때 뒷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도 와이프 우울증이 심해 한국으로 전체 식구들이 돌아갔단다.
또 한국에서 살다보니 정나미 떨어졌던 미국이 생각나서 또
돌아왔단다.
그래서 내가 시카고를 갔을때는 와이프가 옛날의 사람이
아니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서웠다.
밝고 활기가 넘쳐 웬만한 일은 노 프라브럼!
옛날 우리식당의 캐롤씨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맘 먹고 설치니깐 세탁소를 성공적으로 셑엎하고
몇년 사이에 집을 사서 자리를 잡았다.
우리 가족의 미시건호 근처에 별장이 생겼다.
이삼년에 한번씩은 놀러 간다.
남자는 현실을 유지하지만
여자가 맘 먹어니깐 이상이 실현 되었다.
이민 사회에서는 가족의 단결력이 참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