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아가라폭포의 파수꾼
어제밤 일하다가 혜진이 엄마가 나이아가라폭포에
드라이버 삼아 갔다오자 했다.
질풍노도의 혜진이가 아는 언니랑 둘이서 운전해서
간다했는데 걱정도 되고 폭포도 보고 싶어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토론토에서 이백 킬로미터 정도 되어
은근히 멀다.
혜진이 엄마는 폭포의 물소리를 참 좋아해서 보고 있으면
시름을 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이야 가라 폭포"이렇게 말하고
나는 한국의 작아도 깊은 산 속의 소나무 냄새가 어우라진
폭포에 익숙한 탓인지 니나 가라 폭포라고 말한다.
어째든 혜인이도 오늘 따라 가고 싶다해서 아홉시 쯤
되어 식당을 스텦분들에게 맡기고 스시 사시미 한츄레이
만들어서 달려갔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주 동부 쪽 관광하면 기본이
뉴욕과 나이아폭포일 만큼 유명하다.
그 폭포 근처에 한국 사람 식당이 몇개 있고
그중에 제일 오래되서 삼십년 동안 하고 있는 아는
선배님이 하는 식당이 있다.
영빈관이라고 하는 데 전에 식당인 모임을 해서 알게
되어서 잘 지내고 있다.
그 분은 원래부터 한국의 유명 요리집에서 주방장을 하셨고
당시 한국요식인 협회의 총무를 하셨단다.
여기 나이아가라폭포는 막상 와보면 유명세와 달리
아주 시골 스럽고 사람 구하기 힘든데 그 관록 때문인지
혼자서 어떤날 몇 백명오는 한국 관광 손님의 음식을 다 해내신다.
팔십이년도 부터 강산도 세번 변한다는 삼십년 동안 영빈관을
운영하고 계신다.
첨에 너무 힘들어서 애들에게 일불하는 빅맥 햄버거 하나 못사줬다고 했다.
그러다가 잘 되어서 집 살때 현금으로 오십만불을 주고 살 정도로
돈도 벌었다가 한국 아엠에프사태로 곤광객이 안와 다시 다 털고
최근에 다시 재기 하셔서 올해는 굳 이란다.
연락 했더니 서로 만나 소주 한잔 하며 회포를 풀자며
어서 오란다.
그래서 날아서 같더니 찌게도 쥰비하고 이 식당의
엘에이 갈비를 구워서 소주 한 잔하며 지난 얘기를
나누었다. 이 식당의 갈비 맛은 일품이니깐 관광오시면
들러 주시길 바랍니다.
헤인이도 갈비와 치킨 테리야끼가 맛있다며 즐거워 했다.
그 집의 첫째 따님은 팔 구년 전에 한국의 미스 코리아에
캐나다 대표로 갔었고 캐나다 온타리오 대표로 나갔던
엄마를 닮은 미모와 활발한 성격의 재원이다.
둘째딸은 라이프사이언스 과정의 대학원을 나와
너스링 메니저를 전공하고 있다.
여기서는 의대를 갈려면 라이프 사이언스, 생물학이라
얘기해야 하나, 이 과목의 대학이상을 나와야 갈수있다.
그런데 의대를 가지않고 이 과를 택했는 데 간호원을
관리 하는 파트라 의사랑 동급의 급여와 권위가
있다 했다.
지난 이년 서드베리에서 공부 할때 마침 내가 아는 지인이
있어 소개해줘 픽업도 해주고 집도 알아봐주고 해서더욱 친해졌는데 벌써 졸업하고 알버타에 가서 다시
일년 반 과정이 있어 마저 공부 하는라 거기에 있단다.
어쨋든 따님 잘 키워 부러운데 첨에 고생 많이 했단다.
얼마 전에 여기 한국일보에서 폭포 근처의 한인 사회의
산 증인이라며 취재 나왔단다.
그렇게 한 잔 가나하게 분위기가 무러익어 자고 가라고
붙잡어시는 데 혜진이 엄마가 준비가 안됐다며우겨서 다음으로 미루었다.
대신 폭포앞에 차를 세우고 풍경을 감상했다.
오늘 따라 폭포에서 날라오는 물방울이 상쾌했다.
혜진이 엄마 요 근래 모처럼 밝게 웃었다.
새벽 두 시 경 조용한 폭포 와 달리 카지노 근처는
불야성을 이루었다.
커피 한잔 팀홀튼에 가서 뽑고 혜진이 엄마 운전하는데
옆에서 말동무 해주면서 오는데 오늘따라 말도 잘된다.
세월이 갈수록 태생의 겸손함과 달리 나도 모르게 세게 나가곤 하는데
오늘 따라 둘이 있믄 공간이편안했다.
나이가 들며 뜨거운 사랑을 대신하는 정이랄까.
나는 의리라 말하고 싶다.
결혼식도 보면 의리의 서약식같다.
평생 사랑 합니까. 는 사랑하는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아니다.
사랑이 계속 되면 말이 필요없는 법이니깐.
사랑이 계속 되기 힘든 현실에 장인이 사위 한테 하는 말 하는 부탁같은 것이
결혼 서약 같은데 사람 사는 의리의 공식화가 결혼서약 아닐까 싶다.
그래 이란 힘든 생활을 깉이 해나가는 친구가 있다면 같은 남자라면 소주 한잔
사주며 위로해주고 싶을 게다.
왜 여자이면 많이 기대 하게 되는지,
나도 나를 돌아보면서 효원씨는 효원씨대로 돌아 보며
또 주고 받고 그러면서 토론토로 돌아 왔다.
집에 와서 첫 마디. 내 티브이 틀까봐, 잡시다!
그래 자야 내일을 맞지,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