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 저자 서 은국)을 읽고.
이 책을 알게된 것은 우연히 유튜브 인문 강의를
듣다가 '내조의 여왕' 등을 연출한 김 민식 피디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노조 활동으로 피디라는 직업에 복귀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블로그 운영과 함께 책을 쓰면서
연명한 그의 생활력(?) 과 재치 넘치는 언변에
감동을 받았고, 특히 행복은 어떤 인생의 성공같은 커다란 강도가 아니라 소소한 것에 기인한 횟수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나 또한 다른면에서 큰 감동을 받아서
요약을 해본다.
어차피 두꺼운 책도 아니라서 요약할 것도 없지만도.
세상의 많은 책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의미를 찾아라' '가진 것에 만족하라' '긍정적인 생각을 해라' 같은 조언을 한다. 즉 생각을 바꾸라는 말인데 공허한 말 장난 같다해서 '팍' 가슴에 와 닿았다.
왜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힘드냐고 하면 행복은
사람안에 만들어지는 복잡한 경험이고, 생각은
그의 그의 특성중 작은 부분에 일부분 이기때문이다.
즉 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뇌의 주인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며, 그의 유전자에 박힌
가장 큰 욕망과 무엇을 하기위해 설계된 생물학적 연장 인지 알아보면서 시작된다.
그러면서 인간은 100 % 동물이라 단정을 한다.
즉 필자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논문과 책을 읽어보면서 인간은 지능만 높을 뿐 타조나 숭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한다.
삶은 경쟁의 연속이며
입시, 승진, 전철의 빈자리 등 무엇이든 자리 수보다 사람 수가 많으면 경쟁은 불가피하며, 이러한 일상의 경쟁들은 자연의 경쟁 앞에는 시시해지는데
그 자연의 경쟁이 바로 '생존' 이라 한다.
자연의 생존 경쟁은 말 그대로 생명을 건 싸움인데, 승자는 후손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지속하지만 낙오자는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닌 싸늘한 '물질'로 돌아간다.
경쟁중 최고 경쟁이 생존인 것 이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조상들이 우리에게 준 '생존 지침서' 라고 한다.
'사자는 피하고, 믿을만한 녀석과는 고기를 나눠먹고' 등의 깨알같은 생존 팁이 담겨 있다.
USB로 주지 않고, 유전적 정보로 저장해 우리 뇌에 심어 놓았는데, DNA 코드로 작성돼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적인 머리로는 완전히 해독되지도 않는다.
즉 우리가 이해하듯 못하든 중요치 않고, 몸이
손가락을 다섯 개 만들도록, 체온이 떨어지면
몸을 떨도록, 사춘기가 되면 이성에 정신을 쏟도록 자동 실행된다.
호모사피엔스가 문명인의 모습으로 산 것은 진화론적인 관점으로 보면 잠깐이다.
인간이 농경생활을 한 것은 길게 잡아야 6천년 전부터인데 새대로 따지면 250 세대이고, 인간이 침팬지와 진화의 여정을 달리한 것은 600만 년전이며 약 30만 세대 전이다.
시간을 1년으로 압축한다면, 인간이 문명생활을 한 것은 365일 중 고작 2시간 정도이다.
364일 22시간을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사냥,
그리고 짝짓기에만 전념하고 살아왔다.
동물이기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1년중 고작 2시간에 불과한 이 모습에 익숙해서 동물이 아닌 줄 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데, 600만년 동안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 버릇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절대로 그럴 수 없는 동물로서 인간을 단정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이유와 목적이 있으며, 세상만사를 어떤 원인이나 목적, 계획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관점을 철학에서 목적론(teleology)라 한다.
자연의 어떤 것도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생각. 이 목적론적 사고의 원조가 아리스토텔레스다.
즉 그에게 삶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추구하며 그것을 향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 때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이라 보았다.
하지만 세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목적론적 사고를 극복하고 세상을 개관적으로 이해를 할려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저명한 물리학자 캐롤의 표현처럼 '이유 없는 우주(pointless universe)' 에 살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세상은 그 누군가의 계획과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물리학 법칙과 화학 반응에 의해 발생한 것이 우주고, 생명이고, 인간이다.
그 과정에는 어떠한 목적도 이유도 없으며, 인간은 수천개 부품으로 이루어진 시계보다 복잡한 존재지만, 이 복잡성 자체가 초 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며, 모든 생각과 행위의 이유는 결국 생존을 위함이다.
피카소는 캔버스에, 바흐는 악보에 생을 바쳤지만, 이런 행위는 동물이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며 이런 창의적인 노력조차 상당부분은 짝짓기를 위함이며, 최근 진화심리학자들의 견해라고 한다.
공작새의 예가 나오는데 공작새의 꼬리가 생존에 필요한 진화가 아니어서 고민을 하다가 진화에는 생존 뿐아니라 번식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추장스런 숫 공작새의 꼬리와 무늬가 자신이 건강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존재임을 암컷들에게 알리는 과시하는 상징물이다.
바로 공작새의 꼬리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한다.
공작새는 꼬리를, 인간은 마음의 능력을 펼치지만, 심리학자 밀러에 의하면 이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전자를 남기기 위함이다.
유머와 위트는 생존 팔수품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가진 마음의 '수준'을 나타냔다.
위트는 창의성의 표현이며, 높은 창의성을 가진 사람은 멋진 꼬리를 소유한 '인간 공작새'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뛰어난 예술적인 창의성은 로멘스를 만나면 폭발하곤 하는데, 피카소 만의 얘기가 아니라 살바도르 달리, 단테, 구스타프 클림트, 일반 대학생들까지 해당된다.
진화론족인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특성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도구 이며, 신체적인 특성뿐만아니라 고차원적인 정신적인 특성도 이 '생존 도구'의 역활을 한다.
피카소는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 피카소라는 생명체가 그의 본질적인 목적(유전자를 남기는 일)을 위해 창의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며, 사실 마음의 정신적인 산물까지 몸의 번성을 위한 도구라고 한다.
미국 다트머트 대학의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는
세계에서 저명한 뇌 과학자인데, 자신의 책에서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뇌는 무엇을 위해 설계되었을까?
일평생 연구를 토대로 내린 결론은 '인간 관계를 잘하기 위해서'이고 '뼛속까지 사회적(social to the core)라는 표현을 썼다.
즉 인간을 가장 인간스럽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역활이며, 한마디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기위해 발달했다는 것이다.
다리가 잘려나가는 것만큼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집단으로 잘려나가는 것이고, 이때 뇌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기제를 사용해 우리에게 위험을 알린다.
외로움, 배신감, 이별의 아픔,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신호가 보일 때 뇌가 이런 마음의 아픔을 느끼도록 했고, 덕분에 더 치명적인 고립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조상이 물려준 생존 패케지의 두번째는 '쾌감'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생명체가 오래 생존하지
못하는 것처럼 쾌감을 상실한 동물 또한 문제가 생긴다.
배고픈 사냥꾼은 눈 앞에 토끼가 나타날때, 토끼고기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익어갈때, 한 입 뜯어 먹을때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깨알같은 쾌감들을 느껴야 또 사냥을 나가게 되고, 이렇게 사냥을 꾸준히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먹는 쾌감을 느껴야 음식을 찻듯 사람이라는 생존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아주 좋아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인 영양실조'를 막는 방법은 왕성한
'사회적인 식욕'을 갖는 것이고 식욕의 근원은 쾌감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특히 이성)을 만나고, 살을 비빌 때 뇌에서는 사회적인 쾌감을 대량 방출한다.
우리는 이런 사회적 쾌감을 예민하게 느꼈던 자들의 유전자를 지니고 살아서 지금도 사람을 절실하게 찾는 것이다. 가장 강렬한 기쁨과 즐거움을 사람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사람과 무관해 보이는 감정들도 사실 대부분 사람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사냥에 대한 의욕이 다시 생기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는데, 오늘 고기를 씹으며 느낀 쾌감이 곧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쾌감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초기화 과정이 있어야만 그 쾌감을 유발시킨 그 무엇(고기)을 다시 찾는다.
창을 들고 동굴밖으로 다시 사냥을 나서는 이유는 사실 잃어버린 쾌감을 다시 잡아오기 위함이다.
이 무한 반복의 생존 사이클이 지속되기 위해 쾌감의 소멸이며, 소멸되지 않으면 동굴에 마냥 누워 있을 곳이고, 계속 누워 있다보면 영원히 잠들게 된다.
어떤 일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 또한 시간이 지나면 줄어드는데, 이 것을 적응이라고 한다.
적응때문에 무엇을 얻어도 행복은 결국 쳇바퀴를 도는 것 처럼 제자리 걸음을 한다.
쾌락은 생존을 위해 설계된 경험이고, 그것이 제 기능을 하기위해서는 본래 값으로 돌아가는 초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적응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생물학적 이유이다.
그래서 행복은 '한방' 으로 해결되지않고, 모든 쾌락은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는 작은 기쁨을 여러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즉 한 마디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은 타인과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고 한다. 그의 타고난 기질이 어떻든, 어떤 사회에 살고 있든, 일관되게 니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행복은 타인과 교류할 때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일종의 '부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고,
뇌는 사람이라는 생존 필수품과 대화하고 손잡고 사랑할 때 쾌감이라는 전구를 켜도록 설계된 것이라 한다.
가장 본질적인 쾌감은 먹을 때와 섹스할 때, 더
넓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고 말할수가 있다. 진화의 여정에서 쾌감이라는 경험이 탄생한 이유 자체가 두 자원(생존과 번식)을 확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에 대한 핵심을 사진 한장에 담는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며, 문명에 살지만 우리 뇌가 즐거워 하는 것은 바로 두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