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년 만에 한국을 다녀 온 뒤..
지지난해 인가에 십팔년 만에 한국을 다녀왔다.
식당을 팔고 사고 하는 사이에 시간이 좀 나고 한국에서 식당 장비도 사서 부칠겸
겸사겸사 시간을 내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시건으로는 도저히 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맘 속에는 고향도 보고 싶고 부모님 등
친지들과 정을 나누고 싶지만 금의환향도
아니고 해서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하지만 아내가 부모님 살아 계실적 인사라도
드리는 것이 예의라는 말에 자존심 구겨넣고
한국을 그렇게 삼주간 다녀왔다.
식당을 새로 하는데도 자본이 모자라서
아낄려고 대한항공 직항편은 비싸서 피하고
둘러둘러 가는 편은 삼사백불은 아낄수 있었다.
그것 가지고 선물을 살 수 있었다.
요즘엔 한국이 워낙 잘사니 살 것도 사실 없지만.
그저 캐나다 산 좋다는 영양제 정도만.
그리고 아버님 위해서 기내에서 양주정도.
만나는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성의를
표힐려니 장난 아니었다.
그보다 첨 보는 조카들에게 얼마간 용돈이라도 줄려니 참 표도 없이 돈은 흔적이 없다.
정말 독하게 맘 먹고 오천불 안에 어찌 해볼려 했는데 그래도 만불은 들어가는 것
같다.
먹고 자고 공짜(?)에 오랜만이라 식사 대접등을 받는데도 블구하고.
쓸수 있으면 쓰고 싶은데 새로 비즈니스를
하니 거저 맘만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용기를 내서 한국을 보고 오니 참 좋았다.
일단 최소한 가족 도리를 조금이나마 덜은
것이 우선이고, 한국의 엄청난 발전상도
확인해 보았다.
새로 비즈니스를 하면 대박을 내서 한국도
자주 다녀와야 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리고 포항에 가서 거저 선배님 얼굴만
잠시 뵙고 올려 했는데 같이 일했던 동료들도 힘께 해서 좋았다.
하지만 다들 여유있게 편안히 (?)살아가는데
내가 동안 외국에서 뼈 빠지게 고생만 하고
뭐 하고 살았나 하는 자괴감이 맘 깊이 자리를 했었다.
그저 잘 살아서 더 뭔가를 보여 주고 싶고
형제 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에 더욱 매진했다.
좋아하던 골프마저 멀리 하고 새로 일하는
주방 막둥이 처럼 훈련소 이등병의 각오로
맘으로 스시바 마무리까지 마다 하지 않고 지냈다.
어쨋든 식당은 첨 보다 매상은 많이 올랐지만 동안 오르는 인건비와 식자재
그리고 금융비 등에 허덕이면서 지쳐갔다.
기대가 있으면 실망이 따르는지..
그래서 언제가 부터 이 수준에 맞추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각이 들었다.
대박을 기대하기엔 매일의 일상이 지루해서
잊어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국을 모처럼 다녀와서 캐나다에서
살다보니 한국의 교욱시스템처럼 상대 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를 하는데,
의식에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거저
주어진 삶에 남과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고
있지 않았다.
대박난 난 친구 멀리 하고 맘 편한 사람 끼리
얼굴보고 그나마 인맥 다이어트를 하면서
일상의 루틴을 소중하게 유지 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이민 생활 이라는 것은 나에게 한국에서의
삶에 점하나 찍고,
저승가기전에 삶의 집착을 정리하면서
준비하면서 살고 있는듯 느껴진다.
양철북,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의 작가
이십세기 최고 지성이라는 밀란 쿤테라의 말 한마디에
위로가 갔다.
"인생이란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삶이 아무리 잔록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또한 무의미 한 것 이다"
그래도 이 땅에 애들을 키워 본 것은
이 나라 자체가 포항제철에 입사한 복지의
우산을 쓰고 있는 것 같음에 위로는 된다.
적응에 힘든 이민 일세대와 달리 이상하리만큼 미국 보다 캐나다 이민 이세가 취업율이 더 높은 것 같다.
왜 그런지 두고 살펴 봐야겠지만 어쨋든
이세들이 잘 살아가서 다행이다 싶다.
잘 산다는 기준은 경제적인 면도 있겠지만
의식 수준이라 표현 해야 하는 것인지를
모르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려고 하고
한국에서 보다 눈치 보지 않고 순수는 하지만 자기표현이나 자기 실현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 위안을 느낀다.
아마 내가 꿈꾸었었던 젊은 자화상을 보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애들은 애들이고
내 살아가는 자잘한 일상에 빠져 들고 있는 것이 나의 현주소 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