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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년만에 가 보았던 한국 2. 가족상봉

박진양 2015. 2. 10. 16:38

 

한국에 있을때는 와국에 나가는 사람이 부러웠다.

이민 생활을 하니 한국에 가는 사람이 너무나 부럽고

가끔 공항 근처를 지날 때는 비행기를 하염없이 보기도 했다.

한국에 자주 가볼수 있는 여건이 되면 좋지만 없는 사람이

외국에 나온다고 팔자가

쉽게 펴지지는 않는것 같다.

참 이렇게는 한국에 안오고 싶었지만 막상

한국에 도착하니 너무 좋았다.

채면이고 염치를 잊어버릴 만큼.

 

2014년 5월 말 쯤인가 한국은 너무나 포근하고 신록이 넘쳐 나는 풍경에 맘이

사춘기 애처럼 들떴다.

캐나다에서는 그 해따라 추워서 겨울의 잔해를 털어 버리지 못하고

특히 북쪽 도시에 비즈니스를 하려는 맘으로

얼마전 가보았을때도 잔설이 산등성이위로

희끗하고 호수도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곳이

많았다.

그래서 보니 아름다운 강산이었다.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보이는 인천 앞바다가 너무 정겨워 그냥 뛰어내리고 싶은 맘이었다.

공항도 깔끔하고 쾌적하면서 일하는 직원들의 움직임이 역시 잊어버리고 있었던

민첩한 한국 사람 이었다.

이십년 전보다 훨씬 친절하고 외모 또한

업그레이드 (?) 된 듯 해보였다.

무엇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한국 말을 하고 있어 늘 반 정도 들리는 영어권에

살던 나로서는 너무나 편안했다.

그런데 동생이 마중을 나왔는데 이십대

그 얼굴에 기억이 뚜렷한 데 사십대의 고생이 지난 모습에 적응이 되지않았다.

목소리는 맞는데 진짜 동생이 맞는지..

차운전하면서 부담없이 말해주는 멘트로

조금씩 세월의 공백을 메꿔지는 듯 했다.

동생의 결혼식도 물론 보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뒤에 봤는데 제수씨가 정말 참하고 싹싹한 말씨로 우리 없는 공백을

대신해서 부모님 심심찮게 해드리고 있었다.

같이 맥주를 밤새 마시고 나니 가족이라는

실감이 났다.

조카들에게는 내가 큰 아버지 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촌수가 업되고 세월에

밀려나고 있는 듯 하면서 첨 보는 조카들에게 뭐 좀 잘해주고 싶은데 겨우 몇 만원 주는것 외에 더 힐수없는 무력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나마도 식당을 샤로 해야 하고 하던 식당도 이미 처분을

해서 수입원이 없어 아예 얘산을 정해서 쓸려고 환전을

넉넉치 않게 해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돈이 다가 아니라 하지만 현실적으로 와닿는 것은 역시 해주고 싶어도 해줄수 없는 한계의 절감이었다.

그래도 몇 년전에 부모님을 모셔 와서 캐나다와 미국을 구경시켜 드리고 추억이 있음에 그나마 대화의 징검다리가 되어 주어 다행이었다.

어쨋든 가족을 봤다는 것은 정말 기쁜일이고 잘했던 것 같다.

역시 나이들며 그래도 와이프 말을 듣고 살아야 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