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미씨의 " 융, 호랑이탄 한국인과 놀다" 본문에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위안이 되는 것은 결국 사람이 살아가며
역시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과정에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이 책에 있는 내용을 쉽게 설명 할 수 없지만
그냥 기억하고 싶은 몇 마디를 본문에서 옮겨 보았다.
민담은 어떤 세계관이 옳고 정답인지를
말하지 않고 그냥 무의식 과 세상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대로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민담의 이와 같은 중립적 태도는 사실
모든 정신 분석의들이 가져야 할 태도일수도
있다.
나름대로 훌륭한 철학, 방대한 의학상식을
갖고 있는 치료자들은 환자에게 시원한
처방을 내려주고 유려한 해석을 해주려는
유혹을 종종 받는다.
마치 " 이렇게 하면 저런 복을 내리니 당신에게 좋은 일만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교주나 무당과 비슷한 마음의 상태다.
이런 처방을 외부로 부터 피동적으로 수용
하게 되면 시간이 간후에는 그 처방을
쉽게 잃어버릴 것이 뻔하다.
자신이 고민하고 체험한 것이 아닌 처방은
쉽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고된 과정이 생략된 행운은 행운이 아니라
불행이 아니겠는가.
-민담에서-
세상은 과학적이나 목적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합리한 일로 가득차있다.
또한 불공평하고 정당치 못한 사건들이
매일 계속되는 곳이 세상이다.
이를 불교적 사고방식의 인과론으로
해석하건 ,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 들이건,
또는 유교적인 사고의 도와 기의 발현으로
생각하건, 혹은 현대 물리학의 불확실성
원리나 카오스 이론으로 설명하건 물론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민담은 어떤 세계관이 옳고 정답인지를
말하지 않고 그냥 무의식 과 세상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대로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민담에서-
삶 자체가 그렇다.
탄생 이전과 죽음이후가 있기 때문에 삶은
의미를 부여 받는다.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니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기 이전과 사망한 이후,
존재의 피안까지 우리의 언어는 도시 닿을수가 없다. 존재의 시작과 끝에 대해 죽을때 까지 완전하게 파악할 도리가 없으니
삶에 대한 인식 역시 영원히 반쪽일 수밖에
없다.
반쪽 밖에 알지 못하고, 반쪽이 없으면 온전
하지 않는 인생은 우리가 삶에 대해 그리고 남의 삶에 대해 좀 더 겸손 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 반쪽이 에서-
불교에서는 절대자의 존재를 외부에서
찾지않고, 자신의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불성을 들여다 보고 그것을 되찾으라고
주문한다.
이런 주문은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와 대면해보라는 메시지와 통한다.
자아가 사로잡혀 있는 콤플렉스를 걷어내면
우리 마음속에는 불성과 유사한 참자기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보라는 뜻이다.
서역국에 계시는 부처님의 말씀은 굳이
행운을 먼밖에서 찾지말고, 자신 속에 있는
행운의 씨앗을 다시 보고 되살리라는
이야기이다.
-복찾는 총각에서-
힘든 불행과 추한 황폐함의 끝자락에서
문득 위대한 것을 흘끗 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든, 깨달음이든, 사람에
따라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내 안에 나를
넘어선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융에서 말하는 개성화 과정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individual proc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