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4. 식구들
식당은 작았어도 투고(to go) 오다 등을
홀 스텝 말고 따로 채용 했다.
처음 했던 아가씨는 주위 소개로 채용했는데
버스 노선이 애매해 픽업까지 해주었다.
날씨 좋은 날 픽업해서 운전해 올 때
젊고 꿈 많은 아가씨 창밖너머 구름따라 멀리
멀리 날라 가는 듯 보이더니 얼마후 관두고
결혼해서 잘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둘째로 원희씨는 신학교를 마친 전도사 아가씨였는데 싹싹하게 일을 잘 했다.
문제는 나였다.
열심히 일하는 자세가 지나쳤다.
엄격했고 맘 여유가 너무 없었던 것 같다.
언젠가 식사 할때 김밥에 넣을 단무지를
허가없이 꺼내와서 원가가 한 피스에 한국화폐
로 백원이 넘는다는 말을 해서 하고보니
나도 심한 것 같았다.
그래도 꽤 많은 시간동안 열심히 일해주었다.
나도 지금도 그말이 가슴에 맺혀 있는데 결혼
해서 토론토에 잘 살고 있다 들었는데 식사 대접 꼭 한번 제대로 해주고 싶다.
첨 장사 해보면 원리원칙에 충실해서 좋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많은 부분은 알아도 모르는 척도 해야 하고
기다릴 수록 좋은 데 쉽지 않은 것 같다.
그즈음 해서 식당도 바빠져서 디쉬 와셔 한분을 채용했다. 김밥도 틈나는대로 만들었다. 김씨 아줌마로 이민 오신지 이십년이 넘었다. 당시 다운 타운 경기가 나빠 오피스 빌딩의 패스트 풑 가게를 운영하다 빌딩의 아피스가 많이 문닫믄
바람에 가게를 이십오만불 주고 샀다가 한푼도 못 건지고 나왔다고 했다.
아저씨께서 한국에서 장군으로 정년 퇴직 하셔서 장군님이라 우리도 불렀는데 정말 풍모와 포스가 장군님 다왔다.
참 열심히 일 해 주시고 나중에 몇년후 공장
지역에서 패스트 풑 가게를 다시 하셔서
놀러 몇 번 갔다. 우리 애들도 아주 귀여워 해 주시고 다른 식당을 내가 할때 직원들도 소개를 많이 해주셨다.
참 그때는 피끓는 삽십대라 대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같이 일할 때 좋은 말씀도 많이 해 주시고 동안 캐나다 경험도 들려 주시면서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애들 커면 저축을 못하기때문에 지금 벌때에
저축을 많이 해야 된다고 했다.
캐나다에서 이렇게 식당이 금방 잘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잘 될 때 한 푼이라도 저축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또 하셨다.
두어달 또 지나고 헬퍼 한분을 또 채용했다.
한국의 IMF 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오신 젊은
새댁으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첨 봤다.
써니라고 불렀늠데 성질도 불 같고 화통하고 술자리도 좋아해서 어울려서 새벽까지 마셔도 다음날 오히려
더 일찍 나왔다. 술자리라기보다 사람사는 얘기를 참 좋아했다. 샘 아저씨 술 한 잔 하시면 캐나다 백과사점이라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나와는 자주 부딪혔다. 그래도 막상 바쁠때는 호흡이
잘 맞았다.
뒤에서나 앞에서도 몇 번이나 울 곤 했는데도
끝까지 버텨 나중에 아저씨도 같이 일하며
식당을 넘겨 주 듯 메니저를 일년 해서 오만불을 저축해 시골의 어디에 식당을 해서 대박을 냈다.
나중에 집도 사고 섬도 사고 별장도 투자겸해서 구입해 우 리도 종종 그곳에 놀러 간다.
지금도 그때 얘기 하면서 나 앂는게 재미있는지 안주 삼아
밤 새워 술을 마시곤 한다. 그집 아들도 우리 혜진이랑
비슷한 나이인데 폴리스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