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라즈니쉬 얘기 3. 영혼의 스승의 까비르-신비주의 삶

박진양 2013. 4. 20. 16:00

 

 

 

 

 

 

 

 

미래의 종교는 어떠한 교리나 율법에 의해 한정되지 않고,

실체에 대한 시각을 안겨 주는 종교가 될 것이라고

라즈니쉬는 말한다.

의식의 종교가 아니라, 특정한 신을 초월한 존재 자체에

바치는 찬양이 될 것이라 한다.

그리고 아이슈타인이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고,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라즈니쉬는 오히려 "과학이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이고

종교가 없는 과학은 장님이다" 라고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눈을 주기 때문이다.

과학은 기술을 주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 통찰력을 주지는

않으며, 과학은 물질에 대한 통찰력을 주지만 존재에 대한 통찰력을 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혜는 주지않고 힘만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반면에 종교는 힘을 주지는 않고 지혜만을 준다.

동양에서는 사람들은 눈을 가지고는 있으나

무엇인가 할 힘을 갖고 있지는 않다.

미래에는 과학과 종교가 합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 한다.

동방의 예수라고 불리는 인도의 신비주의 시인이자

일생을 옷감짜는 베틀 직공으로 보낸 까비르에의 접근은 수많은 미래의 섬광을 준다고 한다.

천사백사십년에 태어난 가난한 그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 글을 알지 못했고, 시인도 성자도 아닌 채로 노동자로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의 지혜는 학교의 체계화된 교육에서 나오지 않아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삶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힘이 느껴진다.

미래는 시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속하게 될 것이다.

과거는 너무 논리적이고, 종교적인 이론가들이 신학의 표피에서 실을 뽑아내고 천을 짜내며 신의 이름으로

철학을 창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까비르는 어느 종파에도 속해있지 않지만 삶의 시를 통해

신이 무엇인가, 신성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래서 라즈니쉬는 까비르를 봄을 알리는 최초의 꽃으로,

미래의 예고자, 시의 종교에 대한 선구자로서 표현한다.

까비르는 진정한 찬미가여서 삶의 온 빛깔을,

삶의 모든 무지개등을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전체를 찬미했다.

까비르에게 있어 자연이 바로 신이었다.

나무와 강, 산들 오직 살아있는 실재를 믿고,

사원이나 교회나 모스크를 믿지 않았다.

까비르는 교회나 사원으로 부터 사람들을 불러내어 삶에 뛰어 들어 찬미하도록 만들었다.

삶은 질문없이 대답없이 살아가야만 하고,

그 때야 비로소 삶의 확실성속에 살아가게 된다.

삶을 움켜 잡으려고 애쓰지 말고, 삶으로 하여금 우리를

소유하게 하라고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까비르가 옹알 되었던 시 몇 편을

가지고 라즈니쉬는 명해설을 해 준다.

물론 시 자체는 아름다운 시이지만 러즈니쉬가 말해 주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지 잘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라즈니쉬의 손을 잡고 가만히 눈을 감아 보면

생명의 힘을 존재의 가능성을 느낄 수 있다.

몇 개의 짧은 시 귀절이지만 상당히 궁극인 것을 다 내포

하고 있는 듯하다.

숨 속의 숨이라는 시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은유를 한다.우리는 신이 천국이든 어디엔가 더 멀리 있어야 함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추상적인 신과 함께 살아 가고 있다.

" 그대는 날 찾고 있는가?

나는 바로 그대 곁에 있다

그대의 어깨가 나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비 실재적인 신과 더불러 살아왔다.

까비르는 신은 육체 속에서 발견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신은 그대와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라고..

그것이 곧 신이 그리스도로, 붓다로, 크리슈나로 이 지상에

이유이다.

신은 올 때마다 육체로서 오지만 늘 거부당한다.

그 시대 사람이 예수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사도조차 의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 당연하다고 한다.

"그대가 나를 찾을때면 곧바로 그대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단 한순간 만이라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신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그에게로 여행할 필요도 없고,

단지 깨어 있어야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열렬한 탐구 의지가 우리를 깨어 있게

만든다고 한다.

"그는 숨속의 숨이다"

마음이.멈추면 모든 세계가 멈춘다.

마음이 곧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멈춤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숨 속의 숨, 생명 속의

생명이 무었인지 알게 된다.

그 경험이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신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신은 인격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경험인 것이다.

라즈니쉬가 말하길 종교는 경이 속에서 태어나고 경이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이 것이 철학과 종교의 차이란다.

종교는 신비를 탐색하는데서 시작해서 그 신비가 깊어져

가는 것을 발견해나간다.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더욱 적게 알게 되며,

궁극의 앎은 무지이다.

그 순수무지의 경지에서 시는 완전에 이르게 된다.

그 때 그 시는 종교이다.

철학은 종교에 반대한다.

종교적인 철학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철학은 반 종교적인 것이다.

모든 철학은 지식을 추구하지만 종교는 존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피상적이고 주변적이고, 종교는 본질적이고

중심적이다.

철학은 우리에게 안다는 관념을 심어주지만,

종교는 우리가 알지 못하며 또한 알수가 없다는 것,

진리란 미지의 것일뿐아니라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뚜렷히 밝혀준다.

그리고 우리가 알수 없는 진리를 내면에서,

바깥에서 마주치게 될 때 그 때 시는 터져 나오고

우리는 춤추는 가운데 있게 된다.

그 순수속에 삼마디히가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위대한 철학자중의 한사람인 플라톤은

'국가론' 에서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인이 잘못이 아니라 시인을 바라보는 철학자의 눈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란다.

시인은 비 논리적이고 언제까지나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시인은 삶의 신비를 밎기 때문이다.

시인은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

시인은 이유에 대해 근심하지 않고,

그 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그가 우연히 꽃을 발견하면 그것을 즐긴다.

그 꽃을 사랑하고, 꽃과 함께 얘기하며, 마음을 주고 받으며, 춤추고 찬양한다.

이 순간이 모두 시를 위한 것이다.

종교는 시의 궁극의 형태이며 본질적인 형태이다.

우리가 사물 속에서 '아!' 하고 터져 나오는 순간의 감동을

이해해야 한다.

그 때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이해는 지식이 아니고, 지식은 이해가 아니다.

이해는 앎과 다르며 앎은 객관적이며 이해는 주관적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이해한다.

시인은 신비주의자가 되는 도상에 있고 오직 시인 만이

신비주의자가 될 수있다.

시는 합일을 뜻하며 지식은 분리를 뜻한다.

즉 시는 다리를 놓는 것이며 지식은 다리를 파괴하는 것을

뜻한다.

까비르를 기억하자.

까비르는 시인이지 철학가는 아니다.

그는 신비주의자다.

그는 이해를 한다.

아는 것이 아니다.

이해함 속에서 우리는 느낄수 있다.

그 느낌은 가슴으로부터 오며 삶을 맛 볼 수있다.

그 맛은 우리의 혀위에 있지만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단어도 적당치 않고,

어떤 언어도 그것을 나타내기엔 적당치 않다.

그래서 침묵을 통해서만, 아니면 잘해야 시를 통해서만이

그 것을 말해줄 뿐이다.

시는 침묵에 가깝다.

시는 다시 말하고 있지만 또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침묵이 방해 받지 않는 방법으로만 언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경이가 우리의 종교가 되게 하라고 한다.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의 철학적 개념이다.

종교적인 사람은 경이를 진정한 삶으로 삼으라고 한다.

그리고 진정 종교적인 사람은 신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는 강열하게 살며 전체적으로 살고 그 전체로 부터 신이

그에게로 이른다. 신은 전체적으로 산 삶의 부산물이며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까비르는 삶에 대해 긍정적인 신비주의자 였다.

그는 결코 그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도 떠나지 않고, 히말리야 산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깨달음을 얻은자였다.

그는 어떤 상황으로 도피도 않았으며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라즈니쉬가 구도자에게 바라는 것이 이것이었다.

세상안에 있으라, 이 세상이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삶을 사랑하라.

삶을 사랑하면 더불러 그 대는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삶을 추구하라.

그대가 더 깊이 들어 갈수 있도록 그대는 세상이 점점

그 질을 변형시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라즈니쉬는 말하고 있다.

라즈니쉬의 얘기가 늘 그렇듯 우리가 알고 있고,

다니고 있는 교회나 절로 부터 자유롭게 신을 삶에서

찾으라고 여러 선각자나 심지어 성경을 포함한 여러 경전

까지 예를 든다.

그랬으니 자존심 강한 미국이 그냥 있을리 없었고

정의로운 미국, 힘의 미국을 포방한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잘 보일리 없어 추방당하고 추방후에도 미국의 영향력이

무서워 전 세계 어디에도 쉽게 입국을 할 수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가만히 읽어보면 결코 기존의 종교의 부정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다만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을 더 본질적이고 인간 위주의

진정한 르네상스 편에 가까워 보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교회는 자주 못 가도 급하고 외로울 때는

주 기도문을 외운다.

그리고 라즈니쉬는 절대 교회가는 것을 반대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제대로 다니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라즈니쉬는 그럴 것 같다.

내 어깨를 '툭' 치며, 그래 바로 그것이라고.

오 육백년전 같은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고 느끼며

깨달고는 시를 통해 찬양하고 제자들에게 설교했다던

까비르를 통해 나의 삶에도 충분한 가능성과 위로를 받는다.

그래도 그 시대 보다 인권도 보

장되고 맘 대로 책도 읽고 고를수 있다는데 대해서.

이렇게 까비르를 만나는 인연을 준것도.

까비르에 대한 모든것을 다 얘기 할 수는 없고

대신 영어로 된 원문시를 적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