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친구 비 에스 라즈니쉬
몇 년전에 쥴리아 로버츠가 출연 했던 영화 한국말로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며인가 하는 영화를 보았다.
좀 길었지만 서양에서 동양의 정서를 담을려고
그보다 서양과 동양이 만나는 배경이지만 한 개인의
연애사가 포인트였던 것같다.
그 때 잠시 인도 처럼 보이는 구루가 있는 아쉬람에서
기도하고 있는 쥴리아 로버츠가 보였다.
아마 힌두교 출신으로 미국에서도 활동하다가 인도의
아쉬람에서 구 년 동안 세계의 여러 종교를 바탕으로 영적인 얘기를 했던 비 에스 라즈니쉬를 묘사한
모습같아 보였다.
라즈니쉬는 천구백삽십일년 인도에서 힌두교보다 더 엄격한 자이나
교를 믿는 가정에 태어나 일곱살 때 부터 깨달음이 시작해 할머니도 제자로 자처하고
스물한살에는 육체로서는 정점에 이르는 깨달음의 경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스물 여섯에는 강의를 하다
칠십년에는 교수직을 관두고 인도 뿌나에 있는 아쉬람에서 종교적인 내용으로
전세계에서 몰려온 제자들을 위해 강의를 시작햤다.
팔십년대에는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에 있는 제자들이 이십오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크리슈 나무르티 등 동 시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중 한 분으로 살아 있는 성자라고 일컫었다.
성경의 마태복음 강론, 노자와 장자, 붓다, 달마대사,
헤파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카비르 기타등등
생각지 못했던 많은 영역을 오가며 종교가 무엇인지를
천구백 칠십년대 즈음에 구 년동안 설파했다.
우리나나에선 팔십년도에 라즈니쉬의 강의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같다.
난 그 때 이십대였는 데 교회 다니며 산악등반 활동도
하면서 커다란 금서를 보는 느낌으로 책장을 넘기고
아! 이거라는 느낌도 가졌지만 좀 앞서 가서 맞겠다는
나의 영악한 판단도 같이 했었다.
아마 그 관련 책만도 출판사를 떠나 같이 주제만으로
하나씩 묶어도 이 십권은 넘었는 데 캐나다에 와서
이사를 열 번씩 하면서 할 때마다 책이 거추장 스러워
성당의 도서관이나 커뮤너티 센타에 기증을 많이 했는데도 그 책 만은 애착이 생겨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 나이가 또 들면 무슨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그런데 올해는 일이 참 많이 생겼다.
젊었을 때는 넘어져도 운 좋게 새로운 계기로 연결되었데
나이가 들면서 뭐가 그렇게 꼭꼭 밟고 지나가는 지,
그래서 옛날에 보았던 책도 뒤척거리다 젊었을 당시에
딱 하나 대충 봤던 라즈니쉬의 책이 있었다.
죽음의 예술이라는 제목인데 유대인 신비주의 하쉬드에
대한 얘기였다.
라즈니쉬의 책중에 노자나 장자, 그리고 성경등에 대한
얘기는 대충 아는 것도 있고 해서 재미있는 데
제목부터 사람을 어둡게 만들고 젊었을 당시에는 이해도
안되고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나이 오십너머 삶에 지쳐 가다 우연히 창문을
기웃거렸다고나 할 까.
창안에서 큰 웃음소리가 나오는 느낌에 같이 즐거워했다.
그런데 라즈니쉬는 팔십년대 당시에는 현존해서 함께 호흡을 했지만
구십년도에 입적을 했다.
그래도 이렇게 책에서 만나면 별 차이는
없지만.
나에겐 영적인 인류의 스승이라기 보다 친구같은 느낌이
문득 든다.
캐나다에서 본다면
" 하이! 가이!"
"왔서 엎"
"기미 파이브"
"짝! 짝!"
젊은애들이랑 그렇게 장난스레 인사하고 천진하고도
유쾌하게 웃을 것 같은 친구일 것 같다.
가뜩이나 무거운 종교의 옷을 입지않고 삶의 웃음을
터트리는 데 익숙한 동네 꼬마들의 옆집 삼촌같은
분위기를 더 좋아할 것같다.
라즈니쉬가 강의를 많이 하고 누군가가 들은 것을
책으로 낸 것만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본 내용은
단순하다면 정말 단순한 것같다.
마음이라고 지칭되는 과거의 기억으로 쌓아져 미래의 걱정으로 연결되느 에고를 버리고 현재에 충실히 살라는 얘기이다.
정말 단순하다.
그 같은 얘기를 예만 바꾸어 가며 하는 데도 늘 새롭고
흥미가 있었다.
사실 종교 얘기 잘 못하면 큰일 날 것 같은데 내가 보긴엔
종교라기 보다 모든 각자가 믿는 종교를 잘 소화시키는데
보탬을 주는 소화제나 아니면 비타민등의 보조영양제로 생각 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다.
라즈니쉬는 농담을 즐긴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묘사를 농담으로 비교를 한다.
농담을 분석하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된단다.
농담을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웃음을 터지게 할 수는 없다.
듣다가 어느 순간에 반전이 와서 빵 웃는 게 농담이듯
진리에 대한 묘사도 말이나 글로서는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단다.
주관적 느낌이라서라서 체험을 하지 않고선 알 수없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설명보다 비유가 더 어울린단다.
예수님이 비유를 많이 한 것도 그런이유이고.
그리고 지식적인 것은 듣고 잊어버리고 삶속에 빠져 들라는 얘기이다.
아주 확신에 차고 신앙생활 잘 하는 분은 이런 얘기는
흘려 들어도 될 것같다.
어쩌면 이런 얘기는 카카오도 쓰지않는 내 친구 차형한테
내 근황을 말 하는 것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몰라도 서구에선 금세기에 들어 많은
사람이 비종교적으로 되었다.
그 이유는 신이 존재하지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사람들을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사람들이 성년이 되었고 조금 더 성숙해져서,
그들에게 어린시절의 신, 미숙한 심성의 신, 기복신앙으로서 신은 덜 적합하게 되었다.
이것이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을때 그가 의미했던
것이다.
사실 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 조금 부적합 해진 느낌이고 인간이 더욱 자립할 수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종교라는 버팀목에 덜 의지하고 종교에 흥미를
많이 잃었다.
사실 미국이나 캐나다를 보면 교회가 점점 비어가고
목회자를 구하기도 힘들어진다고 한다.
물론 유럽도 마찬가지인 것같다.
그저 종교는 어릴적 부터 태어날 적 부터 물려받은 당연한
관습정도로 익숙해져는 있지만 참여는 적다.
허긴 광신적인 부분보다는 성숙한 인간들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이 더 나아 보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전히 종교적 갈등은 존재하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사이비 종교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고 앞으로도 그런일은 일어날 것같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신을 향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나에겐 그런 거창한 이유를 떠나서,
좀 더 여유있는 삶이라면 나 역시 히히덕거리다
심각한 생각을 안했겠지만
절실한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
미치지 않고 스트레스 덜 받고 살려다 보니
종교적인 생각이상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에겐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일하다가 왠지 기분이 꿀꿀한것이 쌓이면 허전한 맘에
안마셔도 될 술도 마시고, 가끔식 싸가지 없이 구는 손님에 맘 상하고, 내일 모래 가게세 낼려는데 돈은 없을
때 참 뭐 하러 사나 싶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이 들게 하는 자아를 관찰하고
맘을비워 갈 때 훨씬 감정회복도 빠르고 스트레스도 확실히
덜 받는 것을 느낀다.
언제부터인가 잠잘때 구부리고 웅크리고 비틀며 그것도
거나하게 한 잔 걸쳐야 잠을 겨우 잤다.
요즘엔 다시 젊었을 때처럼 반듯하게 누워 얇은 이불사이에 두 손을 가슴위에 놓고 편안하게 잠을 자기 시작했다.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꿈도 내용이 좀 부드러워 진 것같다.
라즈니쉬의 강의내용은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무척 쉽다.
신에게 일방적으로 물질적인 기복신앙으로 접근하기 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또 현재의 삶을 받아들이는데서 무한한 신의
사랑을 경험해라는 뜻 같다.
그러고 보면 목사님이나 스님이 말씀하는 내용과 큰 차이는 없는데
종교라는 부문에 상식을 강조한다고나 할까.
신이 우리에게 준 것에 먼저 감사할 수있는 감성을 일깨워 주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