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영일만의 친구 그리고 윈드서핑2
산다니면서 오환씨를 통해 차형을 알게 되었다.
너무 찬 첫 인상에 흠칫했었는 데 시간이 갈수록 깊이
빠져 갔다.
남자한테 빠진다니 좀 이상한지는 몰라도 참 그런 느낌이
었다.
암벽등반도 같이 하다가 내가 일찍 리타이어(?) 하고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서 친구 따라 용궁까지 같다.
차형은 첨엔 수영도 못해서 어려워 했는 것을 내가
괜찮다며 꼬신 것 같다.
내가 먹거리에 눈이 어두워 헐레벌떡 피슁하는 중에도
여유롭게 순순한 맘으로 바다 정경을 정말 즐긴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다가 윈드 서핑을 시작 하면서 바다의 매력에 같이
흠뻑 젖었다.
그리고 차형이랑 윈드서핑을 타는 틈틈히 산행도 꾸준히
함께 했다.
특히 눈 덮힌 겨울의 복판에서 내연산 뒷쪽으로 넘어가서
상옥가는 중간 화전민 집터에서 야영을 하며 술잔을
기울리며 많은 얘기를 했다.
차 형이랑 같이 있으면 말 많은 나도 주로
" 아!, 네- , 그래요! "
그 정도 말 밖에 안나왔다.
워낙 평소에 독서도 많고 개념 정리가 뚜렷해서 늘 새로
듣는 느낌이었다.
노자와 장자, 도울 김 용옥, 조셉 킴벨의 신화의 힘등
참 여러가지 다양한 소재로서 지적 즐거움을 많이
주었다.
하다 못해 나중에는 삼성의 이 건희 회장이 새로 취임해서
아마 앞으로 삼성이 또 다른 모습으로 도약할 것을
예측도 했다.
왜냐하면 준비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리고 토요일 심야극장은 거의 둘이서 보러가고
끝낸뒤 친구가 하는 카페 까르마에서 날 새는 줄 모르고
또 얘기를 했다.
그즈음에는 재야에 계신 칠순이 넘어선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의 역사학자 한 분도 동참해서 비류백제며
하는 토론에 날 밤을 샜다.
해도 해도 샘물처럼 솟아나고, 늘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결혼하고도 아내가 둘이서 사귀냐면서
농담 섞인 의심을 할 정도였다.
차형은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유식한 사람같았다.
그런데 지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어느 한군데 얽메인데가
없는 열린 마음과 항상 솔직하고 진정한 느낌을 찾아가는 흔치 않은 사람이다.
마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차형은 뭔가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데미안이고 나는 기웃거리는 싱클레아같은 느낌이었다.
차형에게도 또 친하게 지내는 형되는 분이 있어 나중에 셋이서 의형제를 맺게 되었다.
큰 형도 꼬임에 빠져 윈드서핑을 시작하게 되었다.
남자 셋에게 아주 좋은 장난감이 생겼다.
어쩌면 그 때가 인생의 가장 즐거운 때였던 것 같다.
아침 출근 전에 새벽에 불어오는 바람을 가장 먼저 맞았다.
조금이라도 더 타 볼려는 욕심에 회사와 가까운 송도
해수욕장 근처에 방을 당시 월세 삼만원에 빌려서
서핑 보드도 놓아 두고 방에 옷도 걸어 두었다.
윈드 서핑은 남 보기에 시원한 볼 거리를 제공하는 것 같다.
단조로운 수평성을 울긋 불긋한 칼라의 세일이 왔다가다
하는 풍경은 참 평화스럽고도 때론 역동적 기분을 느낄수
있다.
그래서인지 당시 포항 엠비시 방송에서 새해 인사를 할
때면 윈드 서핑 타는 풍경을 잡아 보여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윈드 서핑을 타고 난 다음에 몸이 가렵고
온 몸에 영화에서 본에이즈 걸린 환자처럼 붉은 반점이 생겨났다.
나 뿐 아니라 차형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차형이 일하는 직원 분도 가렵다고 들었을 때 쯤
약국에 가보니 벼룩에 물린 흔적이었다.
그래서 서핑을 보관한 방에 가서 유심히 보니 정말 벼룩이
엄청난 높이로 뛰어 다니고 있었다.
그 전에 그 방에서 개를 낳아 키웠다고 했다.
개는 떠나고 개 벼룩이 나와바리를 치고 있었다.
슈트안에 있었던 벼룩도 물에 가니 살려고 살 속으로 파고
들려했던 같다.
그래서 연고도 바르고는 당시 해도동에서 약국을 하셨던
큰 형집으로 옮겼던 같다.
그리고 그즈음해서 포항 상업은행 지점장님이 서울에서
지방발령을 받아 내려오셨는데 팀에 합류를 해서
실력이 업그레이드 되었다.
서울 한강 미사리에서 타다 보니 보는 것도 많았고
그리고 강폭이 좁아 턴을 자주 하다보니 기술이 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도가 많은 바다는 첨엔 적응 시간이 필요했는데
좀 지나니 날라다녔다.
그리고 지점장님은 인간적으로 정말 소박하고 대개의
스포츠맨이 그렇듯이 담백하고 순수했다.
지방의 관사용으로 아파트를 제공해서 가끔 나도 술 마시다가
그 집에서 자곤 했는 데 항상 윈드 서핑 슈트를 목욕탕에
단정 하게 걸고는 직장외에는 바다 밖에 몰랐다.
그리고 보드를 타다보니 단순한 스피드용은 단조로워
부산에서 국가대표가 탓던 보드를 싸게 해서 샀다.
당시에 새 것이 이백 팔십만원이었고 중고로 백만원을
주고 샀었다.
보드의 메이커는 미스트랄, 오브라이언, 파나틱, 에프투등 참 다양했는 데 그중에 에프투와 독일제 파나틱이 좋았다.
좋다는 기준은 가볍고도 부력이 좋고 세일의 디잔인이
뛰어나고 마스트가 견고 한 것을 얘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기종은 스피드용과 파도를 쉽게 타도록 된 사이즈가 작은 슬라럼이 있었는 데 슬라럼이었다.
그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원정도 다니면서 탔다.
태종무열 왕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와 양포는 정말 타기가
좋은 장소였다.
일월달인가 신라의 달밤이라는 영화에서도 나왔던
감포 앞바다에서 뺄간티를 입고 타고 있는 데 누군가가
와서 국가대표 맞죠, 그러면서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아니라고 해도 해주기 싫어서 그런다고 해서 할수없이
해주었던 적이 있었다.
진짜 국가대표는 부산의 광안리 해수욕장에 가면 볼수
있었다.
황 해구씨가 하는 윈드서핑샾도 그 곳에 있고, 겨울에도
토요일 느지막이 광안리에 가서 모래밭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야영하고 다음날 온 종일
실컷 타고 다녔다.
언젠가는 광안리에서 유에프오가 나타났다.
나도 바다에서 세일링 하느라 못 봤는데 차형은
너무나 뚜렷히 보았고, 그 때 다른 많은 사람도 같이
보았다.
차형 말은 안 믿을 수가 없어 믿을 수밖에 없다.
이민올 때 영일만의 친구들이 모여서 환송을 포항제철
옆 송도 해수요장의 다이빙 샾에 모여 해주고 아쉬워 했다.
특히 지점장님은 언젠가 월포 지나서 물 속 바다밑 바위
틈새에 있는 자연산 굴을 따드렸는 데 아!
이제 그 것 다시는 못먹는구나 하면서 인사를 대신했다.
송도 해수욕장에서 실내 포장마차를 식당보다 크게
하시는 아는 형님은
캐나다 가면 이런 것 못먹어 본다면서 겨울의 소백산에
가서 개구리를 잡아 와서 안주 삼아 먹었다.
이민올 때 보드 두척은 차형께 드리고 왔다.
캐나다 오면 더 좋은 것으로 산다고.
하지만 막상 와 보니 삶의 레벨이 이삼십년 전으로 떨어져 엄두를 못냈다.
십년전인가 심코 레이크에서 누가 타는 데 바람이 세서
밀려왔고 붐 세팅이 금발 아가씨 키에 비해 높게
세팅이 되어 내가 고쳐 주었다.
그래도 또 밀려와 추리닝 바람으로 시범을 보여
주었다.
안빠져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일행들이 와! 한 번 했었다.
그리고 서울의 미사리에 타셨던 분이 이민와서 한번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황 해구씨도 알고 그 세계에 통하는 얘기에 서로 재미있어
했다.
여기에선 밀물이라 보드를 씻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나이 조금 더 들면 중고 보드라도 사서 타고 다닐 계획이다.
차형은 얼마전에 오백만원을 주고 보드 한 척과 세일 두장을 새로 샀고, 울산에서 세계 윈드서핑 대회를 할 때
참석했다고 들었다.
물가 상승을 고려 하면 별로 가격이 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옛날에 그런 활동하느라 나머지 사생할은 줄이고 살았다.
여기 캐나다 사람들도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있으면
다른 것 줄이면서 하는 것 같다.
영일만에 윈드서핑 인구가 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