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울산암과 토왕성 폭포 등반
산악회에 입문하고도 이상하게 선배님들이 일이 생겨
잘 볼수가 없었다.
상철이랑 룸메이트이면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역시
포철 다니던 점식이형도 교대근무로 바뀌어 뜸했고
역시 포철 다니던 강 현호씨도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입원을 했고, 후에 얼마전 까지만 해도 히말리야를 무대로
누빈 규영이형도 그 얼마후에는 낙석사고로 팔을 다치고
쉬다가 다 나을 무렾 회사 회식자리에서 화상사고를 당했다.
식탁위의 남아 있는 휴대용 부탄개스가 폭발해서
그 식탁에서 멀리 떨어진 문 입구에 있었다는데 공기유입통로라
그런지 그 쪽으로 화염이 순간적으로 덮쳤다고 했다.
손이 다 나을 무렾에 그 위에 화상도 입고 얼굴도 입었었는 데
몇 년후에는 재기해서 언제였다는 추렌히말도 등정하고
다음해는 코뮤니즘 그리고 구십칠년에는 초모랑마를
등정하고 이천사년에는 케이 투 북릉코스를 등정했다고
후에 알았다.
산악인의 의지와 집념을 느끼게 해 준다.
어느날 점식이 형이 교대 근무 끝내고 야간 등반을
하겠냐면서 묻길래, 얼른 너무 좋아 따라 나섰다.
밤에 헤드렌튼을 켜고 등반을 했다.
관음암에서 먼저 부엉이코스로 몸을 풀고 크랙코스를
등반 했다.
점심이 형이 선등을 하고 스타트를 지나는 흐르는 벙어리
홀드를 그때는 처음이고 경험도 없어 몰라 미끄러지는
손바닥을 지칠때 까지 더듬다가 결국은 추락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얼굴을 안 까기위해 바위를 밀어버렸는데 땅이 올러오고 바위면이 위로 치솟고
무중력의 몸이 시원해졌다.
그것이 추락이었다.
그리고 연산폭 옆 산악 대피소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면서 정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여전히 포철 다니던 홍 성춘씨가 시간이 되면
리드를 많이 해 주고 장비도 나누어 주었다.
그 해 십일월말에 남규형이랑 규영이형이랑 성춘씨
그리고 나 네명이 삼사일간 설악산 울산암을 등반했다.
밤에 울산암 밑에 도착해서 아침에 바로 눈을 떠서
바위를 보니 엄청난 규모에 억 소리도 안 나왔다.
그 전에 설악산에 와서 멀리 보았지만 바로 옆에 있으니
삼백미터 높이의 표고차를 느낄수있었다.
남규형이 그 때 우리가 가는 히말리야도 첨 도착해서는
엄청난 규모에 기가 죽는다고 했다.
울산암은 바위의 높이도 높이이지만 화강암의 입자가
살아 있어 손에 테이프를 감아도 며칠 등반후에는 살이
터져 유리조각에 난자 당한듯 한다는 데 그래서 등반후에는 기념으로 손을 모아 손사진을 따로 찍었다.
첫날에 무슨 코스인지 사진은 남아 있어도 이름은 생각
나지 않지만 서 너시간 예상을 해서 아침 열시 정도에
시작한 등반이 크랙코스에 난조를 보여 밤 열시에 정상에
도착했다.
칠흙같은 어둠이라 바위로 된 정상에서 쉽게 하강을
할 수가 없고 아침에 하강하기로 했다.
그 날 밤 살다가 제일 긴 밤을 보냈다.
점심 저녁도 못 먹어 배고프고 텐트나 비박 장비조차없어
알비박을 했다.
십일월 마지막 날이라 정상의 조그만 웅덩이에는 얼음이
얼었고 동해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따가울 정도로
차가웠다.
노래도 부르고 발도 구르고 베낭 속에다 안 들어가는 몸도
넣어 보면서 아침을 기다렸다.
그래도 동이 튼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반가운 아침은
잊을 수가 없었다.
희꾸므레 해도 뭐가 보이니깐 하강할 수있는 곳을 확인할 수있었고 사십미터
자일로 두세번 해서 중간에 등산객이 다니는 바위길로
안착을 했다.
그 때 휴계소 관리인이 세상에 이 날씨에 정상에 있었냐면서 공 짜 커피를 주었다.
나중에 추렌히말을 등정한 성춘씨도 그 때의 비박이
히말리야에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규형이 작전이 아니었나도 싶다.
이천사년도에 케투 북릉 원정시에도 대원들 훈련시
사십팔시간 동안 먹고 마시지않으면서 훈련도 하고
그런 혹독한 훈련으로 어려운 산을 사고 없이 등정을 했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남규형이랑 내연산에서 주로 사십킬로
이상의 무게를 진 대학 산악회 수준의 하중 훈련을 하고
다음해 팔십칠년도 이월에는 토왕성 폭포로 빙벽 등반을
갔다.
토왕성 폭포는 겨울 이면 얼어 멀리 하늘에 걸쳐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경치만으로 좋은 데 하단의 높이가
백 삽미터, 중단, 상단은 백십미터 정도 된다고 했다.
빙벽에서는 사고가 나면 얼음속의 확보가 아이스스크류를
박아도 보장이 안되기때문에 사망사고가 나기 쉽다며
아마 그 때 누군가의 하숙방에서 유서도 써 놓고 떠났다.
남규형 빙벽등반의 대가 규형이 형 나 셋이서 등반여행을
갔다.
그런데 입구에서 속초 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관이 얼음이 녹아 위험하다며 등반을 할 수없다며 막아섰다.
그래서 다시 돌아서서 옆으로 능선을 돌아올라서 백미터
이상 절벽을 무거운 베낭을 짊어진 채로 훈련삼아 하강을
해서 토왕성 폭포밑에 텐트를 쳤다.
당시 마산 출신의 최고의 클라이머 이 태식씨가 그 자리의
좁은 계곡에서 눈사태를 만나 아깝게 묻혔던 곳이다.
그런데 우리도 보니 계곡이 좁아 다른 자리도 없고
그 자리에 텐트를 치고는 불안한 마음을 농담으로 털치며
밤을 보냈다.
식사 준비시 물은 근처의 눈을 녹이고 하얀 메리야스 속옷
찢은 걸로 걸러서 하고 커피도 끓여 먹었다.
걸러도 눈이 녹으니 시커멓고 커피는 같은 색이라 차이가
없어 좋았다.
나중에 눈을 파다 보니 노란 것이 있어 보니 똥이 얼어
노란 것이 나왔다.
다시 눈으로 씻고는 다른 곳의 눈을 팠다.
밤에 귀찮아도 될 수있으면 볼일은 멀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언젠가 볼일 보러 멀리 갔다 귀면암의 바위형체가
너무나 의시시하면서도 어둠에 묻혀 있다 걷힌 구름사이의 달빛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타이탄 같아 보여 나중에 산행을
그 근처로 지날때는 잠시 섰다가 지켜보곤 했다.
아침에 토왕성 폭포를 보니 그 백미터 넘는 얼음벽의
위용에 기가 질렸다.
자꾸 장비가 좋아져서 등반이 수월하기는 해도 토왕성
폭포 등반은 산악인에게 히말리야가기전 이름도 알리는
관문과 같았다.
그런데 정말 하단부가 삼사십미터는 잘려나가고 속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빙벽의 대가 규형이 선등으로 바위에 하켄이 있다는 동대
테라스까지 치고 나갔다.
세컨은 나였다.
동안 이 등반을 위해 빈 맥주병에 모래를 넣어 머리위로
치는 동작으로 여름부터 단련하고 겨울에는 보경사 계곡과 청옥 두타산에서 연습을 했었다.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필요이상 많이 찍어 뺄때는 힘들었다.
그런데 동대 테라스 근처에 가니 얼음은 거의 없는 것 같고
바위위에 물만 흘러가는 것 처럼 보였다.
도대체 규영이 형은 이런 곳을 선등으로 무슨 맘을 먹고
지났는 지.
아마 그런 생각의 여유도 있지않았을 것 같다.
아이스 헤머로 얼음을 세게 찍는 순간 얼음이 깨지면서
폭포물이 쏟아지며 내 몸은 추락하며 시계추처럼 확보된
점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롱댔다.
정말 동대 테라스의 단단한 하켄이 아니었다면 둘다
침낭속에 넣어 끌고 내려올 뻔 했다.
겨울의 눈 속에서 사고가 나면 시체를 주로 침낭 속에
넣어 운반한다고 했다.
나중에 남규형이 올러오고 내가 얼음물을 뒤집어 쓴채로
옷도 얼고 해서 저체온 현상이 될 수있다며 입에
먹을 것을 계속 넣어주면서 입운동이라도 하게 만들었다.
그 상황에 남규형이 우스게 농담은 빠뜨리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