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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사하던 날

박진양 2012. 11. 24. 06:28

캐나다에서는 한국과 같은 부엌까지 정리해 주는 포장이사는 없는 것같다.

포장이라이라해도 정리는 본인이 대부분해야 하고

웬만한 것도 미리 싸놓아야한다.

한국처럼 인건비가 삼디 직종이라 싼 것도 아니고

자리 못잡고 살아도 고급 인력(?)들이 이민들을 와서 인지

그렇게 정리해줄 사람도 구하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사할 때 제일 싸게 할 수있는 방법은

시간당 페이를 하는 캐너디언 스타일인데, 중국계에게

맡기면 제일 경제적으로 할 수 있는 것같다.

하지만 보통의 한국 가정은 짐이 엄청나게 많아

그야말로 짐에 치일 정도라 그렇게 이사해서는 끝도

없이 더 댓가를 치룰 수있다.

그리고 콘도나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가고 들어 올때는

엘리베이터를 대개 미리 한 달전부터 예약을 해야하고

그 것도 보통 반 나절밖에 주지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시간에 맞출려면 정말 전쟁을 치루듯 야단법석을 떨고

나서야 가까스로 맞추고 그것도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이사하면 양쪽 다 예약을 하고 정확히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전쟁이 따로 없다.

다행히 우리는 그 때 콘도에서 타운하우스로 이사를

하기 때문에 타운 하우스는 단독 건물이라 아무때나

들어가기 때문에 여유있게 맘을 먹었다.

그리고 이사 비용은 짐에 따라 다른데 대충 지금 지금

살고 있는 곳을 전화로 물어보고 책정도 하고 직접

미리 나와서 견적을 해 준다.

보통 일반적인 이사는 천 불에서 천 오백불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우리는 그 때 비교적 싸고도 순발력 있게 해주는 월드

익스프레스라는 한국분이 하는 이사짐회사에

한 달 전부터 해놓았다.

보통은 며칠 전에 다시 확인하곤 하는 데 벌써 몇 번을

한터라 맘을 놓고 있었다.

아홉시에 오기로 했던 사람들이 열 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 전화를 해서 물어 보니 접수 받았던 직원의 미스인지

이사 날 짜를 잘 못 기록을 했었다.

그래서 올 수 없고 대신 캐너디언 회사를 알아봐서

보내 주겠다는 데 열 두시가 다 되어 충분치 않아 보이는

트럭 한대와 세 사람의 캐너디언 인부가 나타났다.

원래 열두시 까지 엘리베이트를 쓰기로 했었는 데

시간도 지났어도 평소 관리인과 안면을 잘 터 둔 덕분으로

그 부분은 어떻게 해결은 되었는 데 인부들의 작업이

영 아니었다.

이사짐 부터 나르는 것이 아니고 장부 들고 짐만 측정하는라 한시간 소모를 하지 않나,

한국 사람들의 생산성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가 첨 부터 그 사이즈 트럭은 안된다며 얘기를 했는데도

일머리 없이 작업을 한 덕분으로 반도 채우지 못하고도

네시가 되어서 일차분이 떠났다.

원래 계획은 모든 짐이 열 두시 전에 떠났어야 했었다.

그 사이에 월드 익스프레스에 항의를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노스욕에서 별로 멀지도 않는 돈밀과 스틸스에

있는 타운 하우스에 운전을 해서 짐을 풀지는 않고

먼저 돈 부터 달라고 했다.

회사에 전화를 하더니 회사 규정이라고 했다.

할 수없이 천 이백 불 정도를 페이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짐을 실을때는 콘도에 있어 딸딸이에 싣고 엘리

베이터를 이용해서 늦어도 그런대로 하는 인부들이

타운하우스의 계단을 오르 내리면서는 숨을 껄떡대고 제대로 힘을 못썼다.

백인 두사람은 덩치만 컷고 그 중에 한사람은 배가 나와

씩씩 댈줄만 알았지, 너무 느리고 요령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없이 그냥 두면 밤을 샐 것 같아 나머지 탄자니아에서 이민왔다는 팔팔한 흑인과 나, 둘이서

그짐을 거의 다 날랐다.

돈은 돈대로 주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그나마 그 이민 온 흑인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 반도 안되는 짐을 옮기는 것만 열 시가 넘은 던 것같다.

그래서는 끝도 없을 것 같아 중간에 몇 번 월드 익스프레스

에 전화를 해서 다른 집에 이사를 끝내고 열 시가 넘었는 데 대 여섯분들의 인부가 와서 콘도의 짐을 옮겼다.

암만 봐준다고 해도 엘리베이터를 하루 종일 그렇게

전세 낸 것만 해도 엄청난 실례였고 콘도 주민 들중에

한 사람이라도 컨플레인을 한다면 당장이라도 중지될 수있어 진 땀이 났다.

트럭 스케쥴도 안맞아 온 짐을 콘도 진입로에 깔아 놓아서

여간 신경이 쓰이지않았다.

그리고 이사하러 온 친구들중에 보니 아는 젊은 친구도

있어 물어봤더니 그 시간 까지 밥도 못 먹고 있어

부엉이에 가서 식사까지 테이크 아웃해오고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캐너디언들은 바가지만 쓰고 돌려 보냈다.

그 와중에 티비도 한 대 없어 졌는 데 워낙 상식이

없어 컴플레인 할 엄두 조차 안났다.

그보다 그 날안에 이사를 끝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나중에 다른 곳에 온 월드익스프레스 직원과 사장까지

직접나서 열 명 가까이 날랐다.

새벽 두시가 넘어서 타운 하우스에 대충 짐이라도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사람이 오니 진도가 보였고 그 전에 캐너디언의 생산성과는 비교 조차 할 수없었다.

원래 캐너디언들이 말만 많고 실제 일들은 서툴다는 것은

알았지만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단지 전체적인 사회 시스템이 한국보다 나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반은 날랐을 거라는 짐도 삼 분의 일정도

밖에 안되었고 나머지 짐도 웬만한 가정의 짐이서

페이를 안 할 수는 없어서 천 불 정도를 또 페이를 했다.

결과적으로 페이는 두 배가까이 주고도 고생은 고생대로

죽을 고생을 하고 맘 고생 또한 만만찮아 하루 사이에

십 년이 늙어진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내 인생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한 느낌이었다.

짐은 짐대로 나르고 양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콘도측에

사정도 하고 길거리 깔린 짐도 봐야했고

배는 배대로 고파 휘청거렸던 하루였다.

그래서 나중에 이사를 할 때는 현대 이사라고 포장이사를

했는 데 생각보다 괜찮았고 그래서 그 다음에 부탁을

했더니 그 때 이사를 했던 어른 들은 은퇴를 하고 서투른

젊은 사람들이 가구도 많이 망가떠리고 영 별로 였다.

지금 살던에 이사는 토론토에서 제일 비싸고 잘한다는

호돌이 이사회사였는 데 좀 더 비싼 만큼 관리도 꼼꼼히

사장님이 직접 하고 짐 쌀때도 얼마나 철저한지

돈이 아깝지않았다.

내가 본 토론토에서 열 번의 이사중에 결론은 호돌이 이사

였다.

사람은 무슨 일이든 남과의 차이를 주면 인정받는 것

또한 호돌이 이사에게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