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한국에서온 유학생 선배님의 딸
포항제철 다닐 때 잘 알고 지내는 고등학교 선배님이 계셨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 주시면서도 가끔식
뼈있는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는 데 아닌게 아니라
선배님 얘기만 들었으면 인생이 훨씬 시행착오도 적고 현명한 선택을 더 했을 것 같은데 젊은 시절 맘 하나 조용히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뭔가에 계속 몰입하고 열중해야 맘 편하게 생활할 수있었다.
그래도 선배님은 그냥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보였는지
대견스럽게 여기고 칭찬도 해주시고 해서 칭찬은 고래도
뛰게 한다고 더욱 폴짝거리며 뛰어 다녔던 것 같다.
언젠가
결혼전에 포철에서 퇴근할 때 포항 장성동 못 미쳐 북부해수욕장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한잔 사주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시고 그 이후로도 가끔 테니스도 치고 하면서 함께 하는
시간을 종종 가졌다.
선배님은 참 언제 뵈도 모난 데 없이 편한한 모습이었어도 늘 자기계발에
게을리 하지않았다.
이민 왔어도 종종 연락하고 내가 나태하고 타성에 젖을 무렵이면
부드러운 어조로 살 짝 빚대서 충고를 해주셨다.
그 무렵 그 선배님의 따님이 어학 연수하러 캐나다에 온다고 하면서 기왕에 있는 것 우리집에 있으면서 하숙비 똑같이
지불할테니 생활에도 보탬이 되자않겠냐면서 인정많은
삼촌처럼 얘기하셨다.
그러고 보니 예지가 국민학교 육학년 정도 되었을 때 봤는데
벌써 세월이 흘러 스물 네 다섯 정도가 되었다.
아! 나도 선배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줄 수있음에 내심 기뻤다.
그리고 일단 맘은 고마웠지만 첨 캐나다에 와서는 내가 픽업도 해
주고 뭐 도와 줄일이 있으면 다 해주겠는 데 집에 사는 것은
나중에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나도 사실 하숙비 받고 그렇게 있으면 괜찮겠지만 대개
유학오는 학생 입장에서는 외국 생활의 동경도 있고 또 캐너디언
가정에 홈스테이하는 계획도 있기 때문에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막상 있어 보면 별것도 아니다.
대개는 대학이나 학교에 연결된 홈스테이 가정이 거의가 필린핀
캐너디언계통이나 캐너디언이라고 해도 나이든 할머님이 대 다수이고 지내 보면 그렇게 영어한다고 도움이 결정적으로 되지는
않고 본인의 노력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음식도 첨 한 두달은 신기해서 샌드위치나 그런 종류의
음식이 들어가지만 그 기간 지나면 식상해진다
그리고 집 주인도 대개는 돈 때문에
홈 스테이 하는 경우가 많은지 집 위차가 조금 불편한 곳도 많다. 나중에 싼 집 찾다보면 위치가
불편한 데 있고 범죄율이 낮다지만 토론토에 사는 현지 사람이
꺼리는 살짝 위험할 수도 있는 동네에 살곤 한다.
또 그러다 보면 마음 맞는 친구랑 방만 따로 얻어서 자취하는
단계로 넘어 간다.
예지는 조용한 듯 하면서도 맑고 밝은 성격에 붙힘성이 있어
호감이 가는 미인의 당시 대학원을 다니다가 캐나다에 왔었다.
픽업도 해 주고 이사를 가면 차로 날라주고 여행갈일이 있으면
가족 처럼 같이 같다.
그 해 여름은 서드베리에 가족 여행갈때 같이 가서 지인의 집에
머물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는 동안 겨울 정도 되었을 때 쯤이었다.
어느날 식사를 같이 하고 집에 바래다 주는데 버스 정류소에서도
한 참 떨어진 밤 길이 위험 할 수도 있는 곳에 살고 있었다.
본인한테도 물어 보니 벌써 몇 당간의 캐나다 내공으로 이런 저런 사정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아 우리집으로 옮겨서 살게 했다.
우리 애들도 고등학교와 곧 중학교 올러오는 때의 애들이라 자매 처럼
자연스레 어울리고 영어에 대한 것은 애 들과 어울리는 것도 괜찮은 점이
있었다.
그즈음해서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했고 현지 사람에게
영어로 실습도 해 보겠지만 생활의 경험도 되었던 것같다.
그리고 예지는 서둘지는 않아도 성금 성금 일을 쉽게 처리하는 지혜가
있었다.
그렇게 식구 하나가 늘어서 집에도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사람들은 딸이 셋이라고 생각을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