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흘러가는 물결
이천오년도 정도되어서는 주방쪽에는 한국에서 온 분을
직원으로 구하기 힘들고 중국에서 온 한국교포 분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중국에서 온 분들도 학벌과 기업체 근무 경함을 토대한
기술이민 즉 독립 이민도 있고 공산권이라는 것을
이유로 해서 공항에 도착하자말자 바로 난민을 신청하는
난민 이민도 상당히 많았다.
이천 오년 년말을 앞두고 미스터 강이 가게를 한다며
관두고 해서 전력에 차질이 많이 생겼다.
그래도 이십사일과 삽십일은 해주겠다고 약속을 해주고
그때 도와주러 나왔다.
그런데 그때는 주방에 중국에서 오신 교포분들이 맡아주었고 스시바에도 중국 에서 온 군 출신의 스물 대여섯 청년 두명이 스시바 일을 배운다면서 친구끼리
사이좋게 일을 했다.
스시바에서 온 친구 두명은 중국교포라 한국말도 곧 잘하고 눈치도 있는 데 좀 본인들 위주로 많이 생각하는
편이었다.
중국에서 탄압받는 파륜궁이라는 일종의 종교 단체로
인정받는 곳에서 기본적인 출석, 즉 일요일 교회 가듯
그렇게 소속되어 일주일에 한두번 가면 종교적 탄압을
피한 난민 신청이 가능했다.
물론 그 전에 파륜궁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영주권을 위해서라고 얘기하고 그 시간은 식당일의
스케쥴에서 빼기로 합의를 봤다.
어쨋든 그래서 난민이 인정되어 기본적으로 한 달의 천 불 안팎의 정부 보조금이
지급되고 의료혜택도 받을 수있었다.
그래서인지 책임감이 적어서인지 바쁜 연말 이십오일
아침에 친구랑 술마시고 오전에 안나오고 오후 다섯시에
나왔다.
정말 그 날은 나도 어떻게 지나가고 어떻게 그많은 오다를
해냈는 지 불가사의 할 정도로 길게 하루가 지나갔다.
그 날 아침에 지금은 캐나다 청학동에 사는 친구가
당시에 지방의 실업인 협회 회장도 하고 교회 봉사도 많이
했는 데 스키장 간다며 김밥 도시락을 백이십개 정도를
식당 오픈과 동시에 해줘야 했는 데 바쁜 이십사일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혼자 다 싸주고 그날 쓸 살몬 세박스 즉
열두어마리 정도 잡아서 시꼬미 다하고 오다 들어 올때는
주방에 있는 분들에게 김밥 부탁하고 정신없이
마치 전쟁터에서 총알 떨어지고 난 뒤에 대검을
장착하고 백병전을 하는 비장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날 하루에 삼년이 그냥 지난 것 같은 질량감이 들었다.
나중에 젊은 그 친구들의 변명이 대박이었다.
변명도 아니고 술 먹고 못 일어나겠는 데 어떻하냐고
반문했다.
모든 중국에서 온 교포분이 그렇지는 않고 사람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 얘기 듣고는 맨붕이 왔다.
어쨋든 나중에 식당일이 힘들때마다 그 날을 생각하면
힘들다는 생각은 보시랍게 느끼게 된다.
내공을 증진시켜준 고마운 친구라 생각이 든다.
또 나중에 가능하면 좀 맨파워에 덜 의존하는 식당을
찾게 됐는지 모르겠다.
어쨋든 나도 많이 실망이 됐고 연말이 지나며 그래도
그동안 많이 가르쳐 그 두 젊은 친구는 강호에 나가
제법 칼을 휘두른다는 얘기는 뒤에 들었다.
대체적으로 일식당은 일본사람이 하다가 일본의
전체적인 인건비 수준이 나아지며 일본사람이 하는
일식당은 인건비 등으로 웬만큼 고급 식당이 아니면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찾기 힘들고 그 다음에 한국사람이 맡아 하고 대신 일본사람은
주로 홀세일을 한다.
즉 도매상을 하는데 미국의 특히 뉴욕 근처의 공급망은
일본사람이 잡고 있다.
일은 적게 하고도 식당하는 것의 보통 열배 이상의
부가가치를 낸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캐나다에서 중국사람의 일식당이 대세를
이룬다.
사스 이후 중국사람이 많이 뛰어들었고 싼 인건비와
다양한 중국요리를 배경으로 올 유캔 잍 스타일로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한국사람이 하는 일식당에서 점점 한국사람 직원 구하기가 힘든 것이 그전에 일본 사람이 물려준 얘기가
되었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다.
왜냐하면 토론토의 시내 식당의 주방쪽은 이제는 중국교포도 삶의 수준이 나아져서인지 아니면 직업의
선택폭이 넓어져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보기 힘들다.
대신 그 자리에 북한에서 오신 동포분들이 많이 해주신다는 얘기를 듣는다.
흘러가는 물결은 어쩔수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