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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환향

박진양 2012. 9. 17. 17:14

 

저번때 유학 얘기하면서 잘된 케이스중 하나를 소개했는데 오늘 이 친구가 고향에 들렀다.

부모님이 계셔서 고향인가 타향도 정들면 고향 이라던데

아니면 다시 돌아 올 곳이 고향이 되었는 지는 몰라도

이 친구에게는 여기가 고향처럼 느껴진다.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 대학원을 여기서 다 보내고

군 생활을 대신한 연구원 생활을 마치면 다시 이 곳으로

돌아 올 것이니까.

이 친구는 여기서 대학원을 졸업한 젊은 나이지만 여기

기업체에서 연봉 팔만불을 제시하고 취업비자는 당연히

보장했다. 이런 케이스는 일이년 안에 영주권이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군대를 다녀와야 한국 생활도 자유롭고 꼭 한국을

갈 계획은는 아니더라도 가야 할 의무를 느꼈는지 생각을

깊이 해보고 병역의무를 하는 쪽을 택했다.

대신 병역을 대신할 연구원 방향을 알아보았는 데

카이스트와 서울대 등 몇 군데 이력서를 넣었는 데

서울대쪽에서 서류전형 만으로 합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박사과정의 연구원 생활을 이년째 하고 있고

이번에 미국에 세미나 과정에 참석하기위해 갔다

잠시 고향(?)에 들렀다.

어머님 께서 얼마나 대견해 하시는 지,

잔에 뵈었을 때 수줍어 하시곤 했는데 단아하고 차분한

모습은 여전하시지만 꽉 차오른 아드님에 대한 자부심

만큼은 감출수가 없었고 흐러나오는 행복한 웃음을

막을수는 없어 보였다.

와! 이러면 정말 자식 키울 보람이 나겠다는 맘이 들었다.

그래도 어머님 말씀 도중에 너네들 둘 유학 보내느라

서울 강남에 있는 집을 판 것 알지 하고 소녀처럼 웃으며

말씀하시는 데 농담삼아 말씀 하셔도 그 동안 쉽지 않았

을 듯 했다.

또 내가 봐도 나랑 또래라 느껴지질 않을 만큼 품위와

지혜가 넘치시는 어머님에 대한 얘기를 그 친구와 같이

일할때 듣곤 했었다.

웬만큼 착실해도 사춘기가 있고 친구랑 어울리다 보면

삶의 포커스가 흐릴 수 있는 데 어머님께서는 다 믿어

주면서도 친구 관계를 잘 파악했다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한번은 친구랑 어울린 것을 대충 둘러댔는데

평소에 항상 웃어시던 어머님께서는 누구와 몇 시 다음은

어디에 하는 식으로 조근 조근 따져 나가시는 데 아!

이러면 안되는 구나 하고 손을 들고 더욱 착실한 생활을

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자기도 부모님이 안계시고 또 공부를 했다면

모르겠다고 조기유학 문제에서 부모님 중에 한분이라도

계셔야 된다는 것을 그 때 강조 했다.

어머님께서도 친척중에 애를 부탁하는 경우에 그렇게

어른 중에 한 분이 계셔야하는 것을 강조 하신단다.

또 이렇게 애들 둘 유학생활 뒷 바라지 하는라고 유학 이민

전문가가 다 되셨다고 했다.

얘기중에 우리 식당에 있는 웨이츄레스 스텦이 공부하다

비자를 갱신하는 것을 깜박하고 지나서 지금 한국에 가서

다시 들어 올려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안 나가도 되는

방법이 있다면서.

참 캐나다에서는 모든 것이 스텦 바이 스텦인 경우가 많아

그것을 경험한 사람말이 먼저인 것 같다.

특히 이민 유학 문제는 사기에 가까운 경우도 많아

이런 붐의 한 마디 조언은 엄청난 현금적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정말 한국도 법이 많이 발달하고 좋이 진 것같다.

이런 친구를 군대네서 단순 벅무보다는 연구원쪽으로

풀어 주는 것은 국가 경쟁력 측면에사 좋은 것같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식당에 일하고 있늠 웨이트히는 친구도

스물 한살에 동생데리고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 친구는 부모님께서 영주권을 땃다.

그런데 지금은 군대 간다고 하면 일정 점수 이상 되면

영어 원어민 선생으로 군 복무를 대신한다고 했다.

참 합리적 제도가 많이 생긴 것 같다.

이래서 유학을 올려고 많이 하는 것도 같다..

어쨋든 오늘 유태인 개해인 로쉬하나 전날이라 손님 없는

것 각오 했지만 저멱에는 너무 텅 비어 가라앉는 맘은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어 우웅했지만 이런 귀한 잔치자리릉 함께하는 데는 보람이 있고 덩달아 기뻤다.

원래 다른 식당에서 회식을 할려 했는 데 예산도 그렇고

식당 끝내고 가면 시간도 또 늦고 오능 아예 손님 포기하고

일찍 시즉해서 식당 마치는 시간에 같이 떠났다.

화끈하게 짦고도 긴 여운이 가는 회식이랑까.

앉아 있는 동안 정말 손님 하나 안 들어 왔다.

우울해서 표정관리가 안 되었는데 술한잔 하니 내 일 처럼

기분 좋고 즐거움을 느끼고 분위기가 좋았다.

참 이런 맛에 자식 키우는 데

저 옆에 우리딸이 웃으며 넉살을 브리고 있는데

비교하면 안되겠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참 이 친군는 교수님 께서 고향에서 일 주일을 배려해줘서

왔고 다시 돌아간다.

귀공자같은 얼굴이 그 것도 군대라고 힘든지 살이 쏙 빠져

전사 처럼 변했다.

어머님 께서 집 밥 만 먹다 그렇다면서 다시 돌아오면

안 헤어진단다. 결혼 하기전 까지는.

헌 편의 드라마 처럼 아름다운 가족사의 한부분을 보는 것

같아 요샛말로 맘이 쨘 했다.

참 그리고 말 도중에 모든 경비를 아끼기위해 호텔이며

여러 경비를 아꼈단다.

왜냐하면 국가돈이라 아껴야 한다는 말에

" 대- 한 민 국"

응원가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