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사스 2
사스가 토론토에서 진행 되면서 사스라는 질뱡에 대한 두려움보다 마녀 사냥 비슷한
느낌의 언론 보도가 더 무서웠다.
물론 식당주인으로서 비즈니스를 생각한 관점이었다.
강도보다 질병보다 무서운 것은 한 달에 꼬박꼬박
나가는 렌트비와 인건비 등 제반 지출을 위한 현금고갈
이었다.
장사 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찬 가지 일것 깉다.
그래도 내가 피부로 느끼는 것은 없는 데도 방송에서
추정 환자가 그 지역에 나왔다는 그 한마디만으로
그쪽 지역의 상가는 핵폭탄 맞은 것이나 진배 없이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캐나다에서 경제적 중심도시 토론토가 심했다.
그리고 토론토에서 스카보로우, 스카보로우에서도 우리식당이 있는 곳이 유명해졌다.
태풍의 눈에 있는 느낌이랄까.
좋은일로 있으면 얼마나 가문의 영광일까 싶은데
이 세상에서 당시 제일 무서워 하고 기피하는 곳에
내가 있었다.
스카보로는 중국커뮤너티가 많아 당시 캐나다 수상 장 크레티앙이 중국식당에 식사하러 가서 약간 비뚤어진 입을 실룩거리며 괞찬다고 웃으면서 식사중에 하던 제스쳐가 티비에 방송되었다.
사스사태가 났더라도 우리 식당 근처 우리가 사는 콘도에
추정환자가 났다는 기사가 나기 한달 전에 처음으로
이민을 와서 한국으로 송금을 했었다.
처가집에 천불, 서울의 아버님께 천 불, 그리고 마산의
내 친엄마에게 천 불, 살면서 그 순간이 참 보람있고
기뻣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앞으로 매 달 한국으로 송금을 할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싶었고 참 복도 찌질히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인생을 내 위주로 판단하고
생각한 것 같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고 현실을 냉철히 분석하고 판단했어야했다.
골프를 치다 보면 나이스샷 다음에 오는 트러블 샷이
중요하듯 인생에도 잘 풀릴때 보다 풀리지않을때
잘 받아드리고 풀어가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얼마전에 책을 보다 보니깐 잉카 아즈텍의 장비면에서는 조금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어마한 군사력을 지닌 목테수마왕이 불과 육백명에 불과한 코르테스에게
포로로 잡히고 아즈텍 왕국이 멸망하는 과정이 있었다.
먼저 공격할 수 있었는 데 처음 부터 피하고 합리화하면서
그 때를 놓치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한 개인이 사는 것도 좋은 모양새로만 살아 질수 있는 것만으로 인생이 채워 지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 하나 성취할려면 어둡고 칙칙한 긴 터널을 지나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때 너무 빨리 햋볕에 안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때 어느 한 직원도 그만 두게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차일 피일 어려운 얘기 미루다 차라리 내가 좀 쉬지 하면서
일선에 물러나 골프연습하고, 차라리 이럴때 공부해서
로스쿨을 가서 변호사를 해 볼까 하면서 삼 사개월 공부를
해 보기도 하면서 허송 세월을 보냈다.
그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힘들더라도
그 현실을 받아 들일때는 분명히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직원 두어 사람 몫을 내가 하면서
경비도 줄이면서 현장에서 앞으로의 상황과 대세를
내 몸으로 느껴야 답인 것 같다.
하지만 답은 내가 알더라도 지금 실천 하라면 여전히 망설여 지고 잘 못할 것 같다.
직원으로 안 보이고 동료로 보이니깐.
이 것도 팔자거니 싶다.
하지만 그것 까지는 좋다 하더라도 나 자신에 대한 고삐를
풀어 준 것은 정말 큰 잘못이었다.
그래 지금 이나이 쯤 되니깐 내 암만 찌찔한 현실이라도
나의 상황을 받아 들일수있는 것 같다.
오늘 하루 눈떠서 아침 체크 나가는 것 걱정에 이불에서
나오기 싫고 외상값 얘기 할 것 같은 살몬 배달 사장님
얼굴을 무서워 하기보다 저마다의 현실인데 뭐!
되는 데 까지 노력하고 있는 데 뭐!
어쩌라고,
피하지 않고 먼저 얘기할 수있는 용기가 지금은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이런 현실이 인생이고 누구나 그렇게 나름대로
몸부림친다고 이해하니깐 처한 현실이 받아들여진다.
그때는 정말 뭘 해야 된다는 의무감과 아니 이민을
왔으니 뭔가를 보여야 한다는 찌질한 공명심이 있었지
않나 싶다.
아마 그래서 더욱 답답해하고 괴로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고까지가 인생이라고.
너는 여전히 건강하고 삶에 대한 열정이 있지않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