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48.캐나다 사스사태

박진양 2012. 9. 14. 14:15

 

그즈음 어느날 사스라고 듣지도 못한 감기얘기가

티비에 나오곤 했다.

홍콩에서 중국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주황색인가 유니폼

을 입고 뭐 소독하고 저게 뭔가 싶었다.

그러던게 갑자기 토론토에도 감기 얘기가 나오더니

어느날 장난이 아니었다.

환자가 나왔다면서 미국에서 영화찍는 팀도 캔슬되고,

호텔도 비고, 식당비즈니스도 좀 영향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식당이 있는 그옆 콘도에서

추정되는 환자가 나왔다고 티비에 방송되더니 그날부터

손님이 반으로 줄었다.

지옥같은 날의 시작이었다.

그 때 케비에스 아홉시 뉴스같은 여기 토론토 방송에

혜진이 엄마차가 티비에 하필이면 나오기도 했다.

그 콘도에서 집으로 이사하기전까지 살았는 데

그 때 살았다.

또 그 콘도에서 추정환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콘도 복도에서 다니는 사람들은 하얀 마스크를 다 쓰고

다니며 서로 마주치면 고개를 돌렸다.

그 때 그 콘도에서 마스크를 쓰지않았던 사람은

우리 가족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보기에 분명히 이 것은 오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희귀한 병에 걸리는 것은 정말 힘든 확율이라고

우리집 식구한테 얘기해서 태연히 살았다.

하지만 여기 주민들은 패닠 상태에 빠졌다.

뒤에 어떤 소문에는 중국커뮤너티가 너무 캐나다에서

커져서 유태인들이 대부분 잡고 있는 언론사에서 과잉

보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뒤에 보니 우리 콘도의 환자는 단순 감기라고 밝혀졌지만

언론에서 바로 잡아주었다는 기사는 접해지 못했다.

그리고 했다손 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에 그것을 지우기는 힘들다.

그때 언론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자이고 또한 무책임하기

짝에 없는 집단인줄을 경험 했다.

주병진씨 사건도 십년 걸려 무혐의 처리됐어도 거기에

대한 기사는 별로 없다고 해서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은

오해하고 있다는 그 말이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때 지역 티비에서 인터뷰를 청해서 옆의 대형슈퍼마켓

사장과 함께 인터뷰를 했다.

아직 제대로 확인되어있지않는 걸 가지고 과잉보도하는 것이라고 그 영향으로 여기 상가가 다 죽어간다고.

하지만 언론에는 한마디도 그런 얘기는 없고 미리 의도

되었던 얘기만 더 강조 되었다.

그래서 아예 그 큰 플라쟈의 주차장 자체가 텅 비었다.

그때 내 머리도 텅 비었고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뒤 몇달간은 아예 매상은 반으로 떨어 지고 사람들의

기억이 멀어지는 일년 뒤까지 제대로 회복 되지않아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대중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어리석은 대중이라도 외면

하면 나는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줄 깨달았다.

그보다 더 지독한 것은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손님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함부로

스텦을 자를수도 없고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일년을 버티면서 상당히 많은 빚이 깔린 것 같았다.

그전에는 빚이 없어 신용이 좋아 여러가지 형태의

대출이 가능했다.

비즈니스 라인 크레딧, 집가격이 올라 신용대출,

그리고 비자카드, 물건값 밀려 놓으면 또 빚이었다.

여러가지 형태로 깔린 빚은 그 당시에는 잘 몰랐는 데

세월이 가며 참 깊어졌다.

그리고 그 당시 스카보로 리치몬드 통털어 세 식당이

잘 되었는 데 리치몬드 이찌방, 모스시, 그리고 우리식당이었는 데

사스가 끝나면서 우리 플라쟈 근처의 고급콘도 중국

주민들이 하이웨이 칠번 위쪽으로 거의 이사를 갔다.

사스때 일년간 여기 손님까지 그쪽으로 가다 이후에는

지난 이십년간의 새로운 주택개발이 박차를 가해

대세를 바꿔 놓았다.

나는 참 그때 아쉬웠다.

한 일이년 만 더 그대로 밀어 줬다면 상당하게 일어 났을

텐데 내 의지랑 상관없이 사람이 이렇게 되나 싶었다.

그래서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까?

한국의 페혈병 방송되면 문닫던 횟집 풍경과 그 분들의

아픔이 이해되었다.

김 정운 교수말처럼 성공한 사람이 노력해서만 되었다고만 하면 노력해서도 잘 되지 못한 보통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두번 박는것이라는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사람은 아파야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그때 너무 충격을 받아 생각조차 안날 정도로

막연히 잊어버리려는 트라우마가되서 그 시점까지

헷갈렸는 데 한 마디로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그때 신성일씨때문에 고생한 엄 앵란씨의 고통 이기기 얘기, 잘먹고 잘자서 버티자는 그 말이 많이 위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가 처제 처남이 같이 시점도 걸리는 것

같다.

막연히 그때가 힘들었다고 묻었던 기억을 막상 꺼집어 내봐도 어떻게 버티고 지났는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