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인간은 과학을 통해 자연선택을 지적 설계로 대체하고 유기체가 아닌 생명을 만들려고 하는 수준에 왔다.
그 결과에 따라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들의 진로는 전면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류가 어떻게 진화하고 발전해왔는지를 짚어보면서 앞으로 인류가 걸어가는 방향을 예측해 보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인 듯 하다.
하지만 보통의 딱딱한 역사책과 달리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의 번뜩이는 재치와 폭넓은 식견으로 읽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
오히려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어 눈을 뗄수 없는 책이라 하겠다.
그렇게 삼 년전 쯤인가에 흥미진진하게 읽어서
후속편 미래의 예측을 더욱 깊이 시도한 '아마데우스' 또한 얼마전부터 읽고 있는데 전편의
내용이 궁금해서 다시 한번 더 읽어 보면서
요약을 해보고 싶다.
이 책의 전체 내용은 인류의 발전사를 크게 세 개의 혁명 즉, 인지 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등으로
나누고 각 장마다 역사적이면서도 인류학적인 관점, 과학적인 관점 등등.. 여러가지 시야로 설명을 한다.
1. 인지 혁명
먼저 인지 혁명은 대략 칠만 전에 일어났는데
당시에 공존했던 네인데르탈인 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이겼을까 하는 문제까지 도입하면서 바라본 시야가 더욱 흥미가 있었다.
소설처럼도 느껴지는 네안데르탈인과의 조우에
대한 기술은 불과 몇 십년전 까지 고립되어 원시 생활을 한 부족들을 연구한 인류학자의 예까지 나오자 충분히 그럴 것도 같은 생각으로 바뀌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네안데르탈인과 책 제목에
나오는 '호모 사피엔스' 의 차이는 언어의 유연성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체격으로 하면 네인데르탈 인은 아놀드 슈와츠, 호모 사피엔스는 왜소한 체격의 영화 감독
우디 알런에 비유된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덩치도 좋지만 최근에 발굴된 유적에서 보면 정교한 기술또한 있었음이 기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지구의 유일한 종 호모 사피엔스는 뛰어난 언어 능력으로
단합을 이끌어 내어 수백명 까지 협조를 하면서 몇 명이나 몇 십 정도 협조를 하고 살아간
네안데르탈인 를 압도했을꺼라 한다.
그 언어 능력은 요새 흔히 듣는 '뒷담화' 얘기가
나와서 실소가 나왔는데 과학적 연구 결과
약 150명 내외의 사람들 까지는 뒷담화로 결속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
구성원들과의 정보를 나누기 위해 뒷담화는 필수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이상의 인원을 대규모로 협동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허구를 상상하고 말하는 능력이라 하겠다.
그 허구를 만드는 능력으로 인간은 전설이나 신화, 화폐를 만들어 냄으로서 대규모 협력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또한 흥미로웠던 것은 이 시기의 인간들은 뒤에 나오는 일만년 쯤 일어난 농업 혁명의 시기에 살았던 인류보다 삶이 풍요로웠고 영양상태도 좋았다고 한다.
농업 혁명후에는 곡물에만 의존해서 수렵 채취 시절 다양한 먹거리보다 선택의 폭이 좁았고,
또한 잉여 농산물에 의한 문명의 구축으로 인한 착취 구조로서
일반 사람들은 영양이 결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시절에는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기도 전이어서 전염병 조차 없을 꺼라 추측한다.
전염병의 많은 원인이 가축과 생활하면서 일어났고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번성한 진화 심리학에 따르면, 현대의
사회적 심리적특성중 많은 부분이 농경을 시작하기전의 기나긴 시간에 형성되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의 뇌과 마음은 수렵 채집생활에 적응되어 있다고 이 분야 학자들은 말한다.
그 예중의 하나로서 '비만' 이다.
우리는 몸에 좋을 것이 없는
고칼로리 음식을 탐닉해서 비만이라는 악성 전염병으로 신음하고 있고, 이 병은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까지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그 원인은 삼만년전 수렵 채취 생활에서 달콤한
식품은 오직 하나 잘 익은 과일뿐이었고, 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다른 짐승들이 먹기 전에
그 자리에서 최대한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고층 아파트에 살며 냉장고에 먹을 것이 가득하지만, 우리의 DNA는 여전히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고 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우리 인류는 성경에 나오는 에덴에서 추방되기전 아담과 이브 였는지 모르겠다.
2. 농업 혁명
인류는 기원전 일만년전 쯤에 일어난 농업혁명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나은 삶을 주지는 않았고, 그 결과
인구 폭발과 방자한 엘리트(권력자들을 말하는 것일까?)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 채취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댓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 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고 말한다.
그것의 책임은 왕이나 사제, 상인이 아니고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것이 아니었다.
농업혁명을 밀의 관점에서 보면, 일만 년 전에 수많은
잡초중의 하나로서 중동의 일부 지역에서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천 년 지나지 않아 세계
모든 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적 기준에서 따르면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흐름이라고 얘기하는 듯 하다.
그리고 인간의 '밀의 작물화' 기원을 연구하다 보니
수렵채취인들이 야생밀 채취에서 집약적인 밀 경작으로 전환한 목적은 정상적인 식량공급을
늘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원의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식량을 대기 위했을꺼라는 학설이 나왔다.
즉 공통의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하지만 고대 농부는 찢어지게 가난해 보일줄 모르지만, 그의 가족이 소유한 인공물은 수렵 채취인의 부족 전체가 지닌 것 보다 많은 것이 보통 이었다.
또한 인류는 농사를 지으면서 한 곳에 정착하게 되고 경작한 목초지나 곡창지대를 포기할 수 없어 그 장소에 메임으로서 삶의 공간은 축소되었지만 시간은 확장되었다.
수렵채취인은 다음 주나 다음 달에 대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지만, 농부들은 미래를 의식하고 그에 맞춰 일을 해야 했다.
식량은 오늘, 다음주, 다음 달 먹을 것까지 충분했지만 이들은 다음 해와 그 다음 해 먹을거리까지 걱정을 해야 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생산의 계절적 사이클뿐만
아니라 농업 자체의 불확실성에도 뿌리를 두고 있는데, 나쁜 시절이 오지 않을 것란 전제하에 사는 농부는 오래 살지 못했다.
농부들이 미래를 걱정한 것은 단순히 걱정할 이유가 많았을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이러한 농사 스트레스는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대규모 정치사회체제의
토대였다.
하지만 농부들의 노력에 불구하고 대부분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얻지 못했고, 모든 곳에서 지배자와 엘리트가 출연했으며, 이들은 농부가 생산한 잉여식량으로 먹고 살면서 농부에게는 연명할 것 밖에 남겨주지않았다.
이렇게 빼앗은 잉여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퍼센트는 땅을 가는 농부였고,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 사색가...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이다.
역시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하지만 농업 혁명을 통해 인구가 증가하고 잉여 생산물 덕분으로 밀집된 도시와 강력한 제국이 출현하여 사람들은 공통의 신화를 만들어 내며
적게는 수만명, 많게는 수억명이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사람들은 위대한 신들, 조상의 땅, 주식회사 등등의 이야기들을 지어내며 사회적 결속을 제공했다.
이런한 싱상력 덕분으로 지구상 유례없이 거대한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갔다.
3. 인류의 통합
이 장 또한 빼놓고 갈수 없는데
시기적으로 보면 농업혁명이 일어나고 지금 현대에 이르기까지 망라해서 인류 협력 과정을 설명한다.
농업혁명 이래 인간 사회는 더욱 복잡해지고
그런 사회 질서를 지탱하는 상상의 건축물은 더욱 정교해지고,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게 처신하고,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본능을 창조했다.
이런 인공적인 본능을 '문화' 라고 한다.
그리고 인류는 인지혁명을 통해 사회적인 협력을 통해 전지구적 통합을 해왔는데 이는 세가지 보편적인 질서에 의해서였다.
첫번째가 경제적인 것, 즉 화폐질서였다.
두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제국의 질서였다.
세번째가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유발 하라리는 자유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국가 사회주의나 인본 주의등도 종교의 범주에 넣는다.
상상적 허구에 대한 믿음을 공통으로 하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상상의 허구가 인류를 통합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지만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만은 아니라고 역사적인 시야로서 얘기를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책을 통틀어 앞으로 택할 인류의 선택을 고려하면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도 같다.
역사의 선택은 인류를 위해서만은 아니고 역사가 펼쳐짐에 따라 인류의 복지가 개선된다는 증거는 전혀 없으며,
인류에게 이로운 문화가 반드시 성공하고 퍼진다던가 덜 이로운 문화가 사라진다던가 하는 증거도 없고,
역사가 반드시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된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아울러 이러한 문화는 일종의 정신적인 감염이나 기생충 처럼 보고 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새 숙주 역활을 하고 있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문화적인 아이디어는 인간의 마음속에 산다.
기독교의 천상의 천국이나 공산주의의 지상낙원에 대한 믿음 같은 문화적인 아이디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의 전파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 헌신하게 만든다. 해당 인간은 죽지만 그
아이디어는 퍼져나간다.
즉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가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장 좋은 문화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으며
진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개별 인간은 너무나도 무지하고 약해서,
대개는 역사가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또한 역사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이 있는 지평을갖고 있으며, 그중 많은 가능성들은 영영 실현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보면 우리가 아는 분야에만 극한시키거나 우리가 아는 작은 공동체나 이익을 떠나서 더 폭넓고 유연하게 바라보면 인류를 위해 나은 선택이 될 것 이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4. 과학혁명
이 장에서는 역사학자이던 유발 하라리가 갑자기 과학자로 변하고 경제학자이기도 하고 사회학자인것도 하면서 다양한 분야를 왔다갔다하면서 신나게 읽어보다가 나중에는 그냥 흐지부지하게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본다고 내가 아는 지식이 적어 다 이해 못하는 것과 앞으로의 인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솔직히 적고 있음에 작은 실망감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책 내용이 요약될 수 없이 하나 하나
다양한 부분을 접하면서 느끼라는 것 같다.
영감으로 반짝이는 유발 하라리 생각들의 파편을 나름대로 잘 편집해서 판단은 우리의 몫으로 돌린 것 같다.
한번 더 읽어 보니 미완성인 것 같은 이 책이 더욱 현실감있게 오는 것 같다.
과학의 혁명은 대략 오백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안 우리 선조들은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렸지만 현대 과학은 세 가지 점에서 다르다고 한다.
첫째로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가정을 가정하는 것이다.
들째는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서
무지를 인정한 현대 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삼고, 그 수단으로 관찰을 수집한 뒤에
수학적인 도구로 그 관찰들을 연결해서 이론을 만들어 낸다.
세째는 현대과학은 이론을 창조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이론을 사용해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
무엇보다 과학의 혁명은 지식의 혁명이 아니었고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근대이전의 전통 지식이었던 이슬람, 기독교, 불교, 유교는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모든 것은 이미 다 알려져 있다고 단언했다.
성경이나 코란, 베다에 우주의 핵심 비밀이 빠졌다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과학혁명이 일어나기전까지 인류문화는
진보를 믿지않았다.
언젠가 구세주가 나타나서 세상의 전쟁과 기근, 죽음을 끝내리라는 신앙이 많았지만, 인류가
새 도구를 발명함으로써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라는 생각은 터무니 없었다.
수많은 신화는 인간의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는 실망과 죽음을 부른다고 가르쳤다.
상황이 바뀐것은 근대였다.
그런 무지의 인정에서 인류는 새로운 지식을 얻고 적용함으로써 가난, 질병, 노화, 죽음 까지 인류의 피치못할 운명이 아니며, 우리의 무지가 나은 결과라고 한다.
지난 오백 년간 현대 과학이 놀라운 업적을 이룬 것은 정부와 기업, 민간 가부자들의 투자 닥분인데 그 연구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과학은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할때만 번성할 수가 있었다.
이데올로기는 연구비를 정당화를 하고 대신에
과학적인 의제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의 발견을
어떻게 사용할 지를 결정한다.
특히 제국과 자본주의가 과학과의 고리가 지난 오백 년간 역사가 주요 엔진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 권력 중심이 유럽으로 이동한 것은 175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이르러였다.
그전에는 중국과 페르시아 같은 지역이었는데
과학기술의 차이로 벌어진 결과였다.
중국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 기관과 같은 기술적인 발명이 아니라,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 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을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영국을 뒤따라 간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기 때문이었고,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 방식이 달랐던 탓에 빨리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근대 초기 유럽의 잠재력은 자본주의적
생각이었다.
기술적인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과 기술을 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도 과학이 발전되었다는 토양이 조성된 듯하다.
이후 신대륙 발견과 맞물려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
스페인 정복자 코스테스가 아즈텍 왕국 동부 연안에 상륙했을때, 아즈텍인들은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스페인인들은 우주에서 침공해온 외계인 같았다.
아즈텍인들은 스스로 세상을 다 알고 있으며 그 대부분을 지배한다고 믿었지만 그 협소한 시각으로 엄청난 댓가를 지불했다.
다른 아시아의 대국들까지 마찬가였는데 비유럽권에서 과학기술을 이룬 나라는 일본이라고 한다.
지난 오백년간 진보하는 아이디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신뢰하게 만들었다.
신뢰는 신용을 창조했고, 신용은 현실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성장은 미래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면서 도 많운 신뢰를 향한 길을 열었다.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부와 도덕간의 전통적 대립을 부정하고, 부자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
사람들은 이웃의 것을 빼았아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파이가 크짐으로서 부자가 된다.
파이가 커지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데 전제가 있다.
부자가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새로 세우고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는 데 쓴다는 전제가 있다.
자본주의가 '저본주의' 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자본' 과 '돈' 을 구별한다.
자본이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재화를 말하며
부는 땅에 묻혀 있거나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
되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현대의 부자들은 흥청망청 낭비했던 중세 유럽의 귀적들에 반해 자산과 투자물을 조심스럽게 관리를 하고, 그만큼 잘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 팔요치 않는 자동차와 TV 를 사면서 낭비를 한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인데,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 이고
나머지 사람들 계율은 "구매하라!" 이다.
이 장에서는 과학혁명이라는 전제하에 참 많은 분야를 오가는데 심리학적이고 행복론 같은 관점으로 스쳐 지난다.
순수 과학적인 측면으로는 인생의 의미가 없다 고 한다.
"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펴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가 있는 갓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
과학혁명을 말하면서 행복론이 나와 생뚱 맞은 것 같지만 인류가 어떻게 갈지 이 관점에서 고려해본 것은 유발 하라리가 보통 사람의 감수성을 넘어서 인 것 같다.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추며,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의 행복과 고통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생로병사에서 초월할려 하는 신의 위치에 있음을 상기시키고는
그 이에 대한 결론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막을 내린다.
"인간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목표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불만족스럽기는 마찬가인 듯하다. 우리의 기술이 카누에서 갤리선과 증기선을 지나 우주왕복선으로 발전해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과거 어느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이보다 나쁜 것은 인류가 어느때보다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외에는 추구하는 것 외에는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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